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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4

일제 강점기 시인 이상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대부분의 일제 강점기때 시인들은 그시대의 저항정신을 담아 시로 일제에 맞서 싸웠다고 들었는데요. 이에 반해 간접적이고 소극적인 저항시인이 이상이라고 언뜻 들었던거 같은데요. 시인 이상에 대해 궁금해요. 어떤 사람이었나요? 일제강점기때 대표적인 시 내용도 자세히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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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상은 일제강점기 「오감도」, 「이런 시」, 「거울」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1910년에 태어나 1937년에 사망했다. 건축을 공부하고 건축 기사로 일했다. 1933년에는 기사를 그만두고 다방을 경영하면서 문인들과 교류했고 구인회 활동을 했다. 혼인 후 일본에 갔다가 사상불온 혐의로 구속되면서 건강이 악화되어 일본 병원에서 사망했다. 1930년대를 전후하여 세계를 풍미하던 자의식 문학시대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던 자의식 문학의 선구자이다. 초현실주의적 시인으로 무의식 메커니즘을 시세계에 도입하여 시상의 영토를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21년 누상동에 있는 신명학교(新明學校)를 거쳐 1926년 동광학교(東光學校 : 뒤에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병합),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였다. 그 해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근무하면서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1933년에는 각혈로 기사의 직을 버리고 황해도 배천(白川) 온천에 요양 갔다가 돌아온 뒤 종로에서 다방 ‘제비’를 차려 경영하였다. 이 무렵 이곳에 이태준(李泰俊) · 박태원(朴泰遠) · 김기림(金起林) · 윤태영(尹泰榮) · 조용만(趙容萬) 등이 출입하여 이상의 문단 교우가 시작되었다.

    1934년에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여 특히 박태원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小說家仇甫氏)의 1일(一日)」에 삽화를 그려주기도 하였다. 그 뒤 1935년 다방을 폐업하고 카페 ‘쓰루[鶴]’, 다방 ‘무기[麥]’ 등을 개업하였으나 경영에 실패하고 1936년 구본웅(具本雄)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창문사(彰文社)에 취직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퇴사하였다.

    그 해 6월을 전후하여 변동림(卞東琳)과 혼인한 뒤 곧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1937년 사상불온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그 해 4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작품 활동은 1930년 『조선』에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연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뒤 1931년 일문시(日文詩) 「이상한 가역반응」 · 「파편의 경치」 · 「▽의 유희」 · 「공복」 · 「삼차각설계도(三次角設計圖)」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하였다. 이어 1933년 『가톨릭청년』에 시 「1933년 6월 1일」 · 「꽃나무」 · 「이런 시(詩)」 · 「거울」 등을, 1934년 『월간매신(月刊每申)』에 「보통기념」 · 「지팽이 역사(轢死)」를, 『조선중앙일보』에 국문시 「오감도(烏瞰圖)」 등 다수의 시작품을 발표하였다.

    특히, 「오감도」는 난해시로서 당시 문학계에 큰 충격을 일으켜 독자들의 강력한 항의로 연재를 중단하였던 그의 대표시이다. 시뿐만 아니라 「날개」(1936) · 「지주회시(蜘蛛會豕)」(1936) · 「동해(童骸)」(1937) 등의 소설도 발표하였다.

    이상은 1930년대를 전후하여 세계를 풍미하던 자의식 문학시대에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자의식 문학의 선구자인 동시에 초현실주의적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문학에 스며 있는 감각의 착란(錯亂), 객관적 우연의 모색 등 비상식적인 세계는 그의 시를 난해한 것으로 성격 짓는 요인으로서 그의 개인적인 기질이나 환경, 그리고 자전적인 체험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현실에 대한 그의 비극적이고 지적인 반응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 반응은 당대의 시적 상황에 비추어볼 때 한국 시의 주지적 변화를 대변함과 동시에 현대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그러한 지적 태도는 의식의 내면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명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시세계에 도입하여 시상의 영토를 확장하게 하였다. 그의 시는 전반적으로 억압된 의식과 욕구 좌절의 현실에서 새로운 대상(代償) 세계로 탈출하려 시도하는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정신을 논리적 사고 과정에서 해방시키고자 함으로써 그의 문학에서는 무력한 자아가 주요한 주제로 나타나게 된다. 시 「거울」이나 소설 「날개」 등은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시 「오감도」는 육체적 정력의 과잉, 말하자면 발산되어야 하면서도 발산되지 못한 채 억압된 리비도(libido)주1의 발작으로 인한 자의식 과잉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대상을 정면으로 다루지 못하고 역설적으로 파악하는 시적 현실이 잘 드러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역설에서 비롯되는 언어적 유희는 그의 인식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동시에 독특한 방법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억압받은 성년의 욕구가 나르시시즘(narcissism)주2의 원고향인 유년시대로 퇴행함으로써 욕구 충족을 위한 자기방어의 메커니즘을 마련하였고, 유희로서의 시작(詩作)은 그러한 욕구 충족의 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 만큼 그는 인간 모순을 언어적 유희와 역설로 표현함으로써 시적 구제(詩的救濟)를 꾀한 시인이었다.

    기타 시작품으로 「소영위제(素榮爲題)」(1934) · 「정식(正式)」(1935) · 「명경 明鏡」(1936) 등과, 소설 「봉별기(逢別記)」(1936) · 「종생기(終生記)」(1937), 수필 「권태(倦怠)」(1937) · 「산촌여정(山村餘情)」(1935) 등이 있다. 유저로 이상의 시 · 산문 · 소설을 총정리한 『이상전집』 3권이 1966년에 간행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상


  • Slow but steady
    Slow but steady23.05.14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37년 사망할 때까지 생전에 작품집을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기림에 의해 1949년 출간된 「이상선집」이 최초로 만들어진 이상의 작품집이었습니다. 전집으로서는 이상 사후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문학평론가 임종국에 의해 「이상전집」(1956, 전3권)이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일부 주장에 따르면, 이상은 언어유희를 이용하여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발간하는 종합전문 월간지에 큰 글씨로 12, 12라는 제목의 소설을 연재하는 방식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은 12, 12를 단순히 숫자로만 이해했고 한글 발음으로 했을 때 욕설이 된다는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을 이용하여 이상이 그들을 골탕먹였다는 것이라고 하나 이는 이상이 일제에 대한 큰 반감이나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적은 없었다는 점에서 부정되기도 합니다. 이상은 일제에 적극적이던 비 적극적이던 저항 시인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상 작가는 1910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고 활동한 한국의 시인, 소설가, 수필가, 건축가, 화가 이기도 합니다.

    1930년대 국내에서는 선구적인 모더니즘 작가로서 약 6년간 다수의 시, 소설, 수필을 집필하여 인간 사회의 도구적 합리성을 극복하고 미적 자율성을 정립하고자 했습니다.

    1931년 시 이상한 가역반응과 파편의 경치를 조선과 건축지에 발표하였습니다.

    1932년 시 건축무한 육면각체를 발표하면서 이상 이라는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했고 그 이후로도 계속 이상 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시인 이상의 대표적인 시가 오감도입니다. 오감도는

    한 아해가 달려갑니다.

    들째 아해가 달려갑니다.

    셋째 아해가 달려갑니다.

    :

    열세번째 아해가 달려갑니다. 로 이어지는 시로 끝없는 불굴의 독립정신을 그리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