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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1.25

중국 사상가인 한비자에 대한 간략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ㅎ

중국의 여러 사상가들을 공부하다 한비자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손자병법의 저자로 알고 있는데요. 한비자가 내세운 대표적인 사상과 저서를 알고

싶습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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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든든한소쩍새224
    든든한소쩍새22423.01.25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한비자》는 중국 전국 시대

    '한비' 등이 쓴 책으로 법가

    사상을 집대성하고 있다.

    이 책은 중국 고전시대 다른

    많은 책처럼 집단적 저작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편장은

    어느 정도의 일관성 아래에

    포괄될 수 있는 부분들임이

    명백하다.

    --출처:위키백과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비자는 엄격한 법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의 생각에 휘둘리지 말것, 능력있는 자를 등용해 능력 없는 권세가를 쫓아낼것으로 정리됩니다.

    한비자가 직접쓴것으로 추정되는 저서는 오두, 현학, 고분 입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한비자는 [ 손자병법 ]의 저자가 아닌 [ 한비자 ]의 저자이며(* 손자병법은 병성이라 불린 '손무(손자)'의 저서입니다.) 사람은 본래 '상'과 '벌'로써 다스려야 하고, 법에 근간한 법치주의로써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정치관을 주장했던 제자백가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의 법가 철학자.


    진왕(秦王) 정(政 : 후의 始皇帝)은 그의 전제정부에 관한 이론에 깊은 감명을 받아 BC 221년 중국을 통일한 후 이를 통일국가의 정치원리로 삼았다. 그의 이름을 따라 한비자로 명명된 그의 저서는 당시 법가 이론의 총괄이다 (→ 색인 : 중국철학).


    생애

    한비자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전국시대(BC 475~221)의 약소국이었던 한(韓)나라의 귀족 출신이었다. 한비자는 유가인 순자(筍子)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나, 나중에 순자를 저버리고 그당시 봉건체계가 붕괴되는 상황과 보다 밀접한 이론을 가진 다른 학파를 따랐다. 자신의 충고가 한 왕에게 무시당하자 한비자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그는 말솜씨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론에 대해 있을지도 모를 반론에 대한 논박도 글로 썼다. BC 221년 통일 후 시황제가 된 당시의 진왕 정은 한비자의 글을 읽고 이를 높이 평가했다. BC 234년 진은 한을 공격했고, 한왕은 한비자를 진에 협상자로서 파견했다. 진왕은 한비자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높은 직위를 주려고 했다. 진의 승상이자 이전에 한비자와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한 이사(李斯)는 한비자가 자신보다 더 뛰어났기 때문에 왕의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 한비자가 이심(二心)을 가졌다고 모함하여 그를 투옥시켰다. 이사는 한비자를 속여 그가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게 했다.


    정치사상

    한비자는 정치제도란 반드시 역사적 상황과 함께 변화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유가처럼 과거의 낡은 제도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사회에 속하는 사람들의 풍습은 도덕적 감성이 아니라 그 사회의 경제적 여건에 의해 변화하며, 정치제도는 당연히 이것에 따라 조정되어야 한다. 흉년이 들면 사람들은 그 친척에게도 양식을 주지 않지만, 반대로 풍년이 들면 낯선 사람에게도 음식을 대접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인색하거나 관대하기 때문이 아니고 구할 수 있는 양식의 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자가 풍부했던 옛날에는 사람들이 재물을 가볍게 여겼으나, 인구가 점점 증가하여 물자가 부족하게 되자 사람들은 재물을 두고 서로 다투게 되었다. 따라서 군주는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기보다 악한 일을 하는 것을 막도록 해야 한다. 백성들은 이기적이면서도 무엇이 진정 자기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군주는 그들의 인기를 얻으려고 노력해서도 안 된다. 백성들의 마음은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아서 믿을 것이 못 된다. 유가의 이론에 따르면 덕이 있는 왕만이 다스릴 수 있으며, 덕이 없는 왕은 그 지위를 잃게 된다. 그러나 한비자의 생각은 이와 달랐다. 통치자의 도덕적 품성이 어떻든 또 그가 어떻게 다스리든 상관없이 권력(그는 이를 愼到의 이론에 따라 勢로 설명했음)을 가졌다는 것은 이에 대한 절대 복종을 요구할 권리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색인 : 권위). 신하가 군주에게 복종하며, 아들이 아비에게 복종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서나 변함없는 대원칙 중의 하나이다. 군주가 비록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도 신하는 군주의 자리를 감히 넘보아서는 안 되며, 정치적인 의무는 다른 모든 의무에 우선되어야 한다. 어떤 병졸이 그가 전사하면 부모를 봉양하지 못할까 두려워 싸움터에서 도망쳤다. 한비자는 이에 대해 "효자는 그 군주를 배반하는 신하가 될 수 있다"라고 평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 춘추 전국 시대에서 법가는 공자의 유가, 노자의 도가, 묵자의 묵가와 함께 제자백가를 대표하는 네개의 유파중에 하나로 오로지 법만이 모든것을 해결할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혼란스러워하는 백성의 고통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엄격한 법 진행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백성을 잘 다스려서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면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가 이루어져야한다고 해서 봉건제가 아닌 군현제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법가의 사상을 집대성한 사람이 한비자입니다.

    한비는 전국시대 말기 한나라에서 한왕안의 서자로 태어났지만, 신분이 낮은 어머니때문에 대우받지 못해 일찍부터 학문을 두루 공부했는데, 그중에 주목한것은 법가였습니다. 한비자는 하루가 멀다고 전쟁이 일어나는 때에, 기존의 사고와 체계로는 나라를 절대 부강하게 만들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법치라는 새로운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릴것을 건의했지만, 무시되자 울분을 터트리며 10만자의 달하는 책을 쓴것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한비자라는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