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죽고나서 왕위에 오른 혜종 때에는 왕권이 불안정하여 왕족들과 외척들 사이에 계승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왕권의 불안정은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호족 세력을 규합하기 위하여 취하였던 혼인 정책 때문에 나타난 부작용이었습니다. 왕건은 전국 팔도의 호족을 견제 하기 위해서 맞은 왕비만 30명 가까이 되었다고 합니다.
재위 초기 왕건의 부탁을 받은 공신 박술희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나 박술희는 군사적인 기반은 지녔지만 정치적으로 실세를 쥐고있던 권력자는 아니었고 왕건의 후견인 선정이 완벽하지 못한 것으로 박술희는 혜종의 적으로부터 왕을 지켜내지 못했고 왕규에 의해 피살당합니다.
호족 세력이 강했던 시기 혜종의 외가가 미약했음에도 왕건은 그를 위해 적절한 후견인을 지정해주지 않았는데 혜종이 장자이기 때문인지 청주, 진천, 광주 일대 호족과 결혼했지만 아무래도 경순왕과 결혼한 낙랑 공주의 영향력을 이기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왕건이 왕심력으로 대표되는 서경 세력이나 개경 및 황주 등의 패서계 호족들 혹은 경주의 구 신라 왕가 세력이나 박영규로 대표되는 후백제 세력 등 마음만 먹으면 쟁쟁한 후견인을 지정해줄수 있었음에도 왕건은 박술희 한명만 붙여주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