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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태양새285
탁월한태양새28523.05.23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옛날 고려시대에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위화도 회군을 할 당시 시대적 배경은 어떠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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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3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위화도 회군의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명나라가 무리한 공물을 요구해 매우 긴장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1388년에는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해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도사(遼東都司)의 관할 아래 두겠다고 통고해 왔다. 이에 고려가 크게 반발해 결국 요동정벌로 이어졌다.

    경과

    요동정벌이 단행될 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할 뿐 아니라,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고 왜구가 창궐할 것이며,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4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우왕과 문하시중 최영(崔瑩)이 강력하게 주장해 요동정벌이 실행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에서는 8도의 군사를 징집하는 한편, 세자와 여러 비(妃)들을 한양산성(漢陽山城)으로 옮기고 찬성사 우현보(禹玄寶)로 하여금 개경을 지키게 한 뒤 우왕과 최영은 서해도(西海道)로 가 요동정벌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이해 4월에는 우왕이 봉주(鳳州)에 있으면서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임명하고, 창성부원군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로 삼아 서경도원수 심덕부(沈德符), 서경부원수 이무(李茂), 양광도도원수 왕안덕(王安德), 양광도부원수 이승원(李承源), 경상도상원수 박위(朴葳), 전라도부원수 최운해(崔雲海), 계림원수 경의(慶儀), 안동원수 최단(崔鄲), 조전원수(助戰元帥) 최공철(崔公哲),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조희고(趙希古)·안경(安慶)·왕빈(王賓) 등을 소속시켰다.

    또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안주도도원수(安州道都元帥) 정지(鄭地), 안주도상원수 지용기(池勇奇), 안주도부원수 황보림(皇甫琳), 동북면부원수 이빈(李彬), 강원도부원수 구성로(具成老), 조전원수 윤호(尹虎)·배극렴(裵克廉)·박영충(朴永忠)·이화(李和)·이두란(李豆蘭)·김상(金賞)·윤사덕(尹師德)·경보(慶補),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이원계(李元桂)·이을진(李乙珍)·김천장(金天莊) 등을 소속시켜 좌·우군을 편성하였다.

    이때 동원된 총 병력은 좌·우군 3만 8,830명과 겸군(傔軍) 1만 1,600명, 그리고 말 2만 1,682필이었다. 곧이어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 머물면서 독전하고,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좌·우군은 10만 대군을 자칭하면서 평양을 출발해 다음 달에 위화도에 둔진하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 도망치는 군사가 속출했고, 마침 큰비를 만나 압록강을 건너기가 어렵게 되자, 이성계는 이러한 실정을 보고하면서 요동정벌을 포기할 것을 우왕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요동정벌을 독촉하자,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한 뒤 회군을 단행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화도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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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중국은 원나라가 점점 힘을 잃고 몰락하고 명나라가 중국 땅의 새주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명나라가 본격적으로 영토를 넓히기 시작하면서 철령 이북의 땅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며 고려에 영토반환을 요구, 철령 이북땅은 고려땅이었지만 원나라때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던 지역으로 원나라가 힘을 잃어 세력이 약해지자 고려가 공민왕 때 되찾은 땅입니다.

    당시 고려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최영은 명나라의 이런 요구가 고려를 침략하기 위해 압박하는 것이라 생각해 강하게 반발하고 고려가 먼저 요동지역을 공격해 힘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성계는 4불가론을 제시하며 요동 정벌을 반대합니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둘째, 여름에는 농사가 바빠 군사를 동원하기 어렵다.

    셋째, 많은 군사를 움직이게 되면 왜구가 쳐들어 올것이다.

    넷째, 장마철이라 덥고 습해 전염병에 걸릴 것이다.

    우왕은 최영의 뜻이 확고하여 이를 듣고도 요동정벌을 결정합니다.

    요동정벌을 위해 최영을 최고 책임자인 8도 도통사로 삼고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로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로 삼아 최영은 전체적인 지휘를 하고 군대는 이성계와 조민수가 통솔해 요동으로 이동합니다.

    요동정벌을 위해 원정을 떠난 이성계는 압록강에 위치한 위화도에 도착하지만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너기 어렵다는 이유로 14일을 지켜만 보고,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고 여름이라 싸우기 힘들다고 하는 등 여러 이유를 말하며 군대를 되돌릴 것을 요구하나 조정은 받아주지 않았고, 이성계는 조민수과 모의한 후 군사들을 설득해 회군을 결정하고 군대를 돌려 반란의 주동자로 개경을 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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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요동정벌이 단행될 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할 뿐 아니라,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고 왜구가 창궐할 것이며,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4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반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우왕과 문하시중 최영(崔瑩)이 강력하게 주장해 요동정벌이 실행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고려에서는 8도의 군사를 징집하는 한편, 세자와 여러 비(妃)들을 한양산성(漢陽山城)으로 옮기고 찬성사 우현보(禹玄寶)로 하여금 개경을 지키게 한 뒤 우왕과 최영은 서해도(西海道)로 가 요동정벌의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이해 4월에는 우왕이 봉주(鳳州)에 있으면서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임명하고, 창성부원군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로 삼아 서경도원수 심덕부(沈德符), 서경부원수 이무(李茂), 양광도도원수 왕안덕(王安德), 양광도부원수 이승원(李承源), 경상도상원수 박위(朴葳), 전라도부원수 최운해(崔雲海), 계림원수 경의(慶儀), 안동원수 최단(崔鄲), 조전원수(助戰元帥) 최공철(崔公哲),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조희고(趙希古)·안경(安慶)·왕빈(王賓) 등을 소속시켰습니다.


    또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안주도도원수(安州道都元帥) 정지(鄭地), 안주도상원수 지용기(池勇奇), 안주도부원수 황보림(皇甫琳), 동북면부원수 이빈(李彬), 강원도부원수 구성로(具成老), 조전원수 윤호(尹虎)·배극렴(裵克廉)·박영충(朴永忠)·이화(李和)·이두란(李豆蘭)·김상(金賞)·윤사덕(尹師德)·경보(慶補),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이원계(李元桂)·이을진(李乙珍)·김천장(金天莊) 등을 소속시켜 좌·우군을 편성하였습니다.


    이때 동원된 총 병력은 좌·우군 3만 8,830명과 겸군(傔軍) 1만 1,600명, 그리고 말 2만 1,682필이었습니다. 곧이어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 머물면서 독전하고,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좌·우군은 10만 대군을 자칭하면서 평양을 출발해 다음 달에 위화도에 둔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도망치는 군사가 속출했고, 마침 큰비를 만나 압록강을 건너기가 어렵게 되자, 이성계는 이러한 실정을 보고하면서 요동정벌을 포기할 것을 우왕에게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요동정벌을 독촉하자,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한 뒤 회군을 단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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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사실상 고려의 군대로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였다고 판단한 것도 있고, 조민수 등 장군들의 신뢰를 얻어 군대를 돌림으로써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최영을 몰아낼 기회였기에 회군한 것도 있습니다. (* 시대적으로 왕권이 매우 불안정하고 약했던 시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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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이유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에 기인합니다. 이성계는 고려 초기에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위화도 회군은 그의 정치적 조치 중 하나였습니다.

    위화도 회군은 13세기 초에 이뤄진 사건으로, 이성계가 권력을 갖게 되기 전인 1219년에 실시되었습니다. 당시 고려는 외적인 위협과 내부 분쟁으로 인해 동요하고 있었습니다. 이성계는 자신의 권력을 견고히 하기 위해 경기 지역에 집결한 군사력을 이용하여 회군을 벌였습니다. 이 회군은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적인 안정을 추구하기 위한 이성계의 의도였습니다.

    시대적 배경으로는 고려 초기에는 여러 가문들이 권력을 쟁탈하고 있었고, 외적인 위협으로는 몽골의 침공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성계는 이런 내외적인 도전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력을 활용하고 신속하게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회군은 이를 통해 자신의 권력과 고려의 안정을 확립하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이후 이성계는 회군을 통해 권력을 강화하고, 고려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며, 나아가 고려를 통일하고 조선을 세우는 데 이바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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