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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활한이구아나273
쾌활한이구아나27321.12.21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무엇인가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해서

조선을 건국했다고 하는데요

이 위화도 회군이 뭔지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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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거북이놔두루미입니다.

    이는 왕의 명령을 어긴 군사 행동으로 반란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성계는 개경을 점령하고 최영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서 승리하고, 우왕을 폐위하였으며 최영을 경기도 고양으로 귀양 보낸 후 역모 죄로 처형하였습니다. 이를 위화도 회군이라고 합니다(1388).


  • 안녕하세요. 이양균 경제·금융전문가입니다.

    고려 우왕과 최영은 너무 환상에 빠져있었던 겁니다명나라가 자신들이 원나라가 다스리던 지역을 직접 통치하겠다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됩니다

    이에 우왕이 요동정벌을 결심한거죠

    그러나 현실적으로 당시 고려의 병력으로 요동을 어떻게 공격을 해서 단기간 점령을 할수 있어도 그 요동을 장기적으로 지배하는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이성계와 조민수등은 이런 현실을 보고 날씨도 우호적이지 않은걸 알고 위화도 회군을 결정한거죠!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 후기 고려사에서 전쟁부분을 이해하고 넘어가시면 더 쉬울 듯하니 설명해볼게요

    몽골이 세운 원나라가 시간이 지나 부패하고 중앙권력이 약화되는 시기(원명교체기)에 곳곳에 자립을 위한 봉기가 일어나고 사회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하며 곳곳에 침략도 일어나고 난세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고려는 해안가는 왜구, 북쪽은 홍건적과 이민족의 침략이 있었죠. 이 시기의 외침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이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운 장수 중 가장 괄목할 만한 게 이성계와 최영이었습니다.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며 무패의 실적을 쌓고 있었죠.

    마침 알다시피 고려에는 자주성이 강한 공민왕이 등극해 있었고 공민왕은 이 정국을 기회로 바꾸어 영토확장의 발판으로 삼고 쌍성총관부, 동녕부를 탈환시키고 추가로 북진해서 길주까지 영역을 확장시킵니다. (1차) 또한 이성계를 보내 요동을 정벌시키죠. (2차)

    이 당시 요동을 정벌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를 1차 요동정벌이라 부릅니다만 정벌당시 군량이 불태워져 수비의 문제가 대두되어 후일을 기약하며 그냥 포기하고 나옵니다.

    이 때 중국에서는 주원장의 명나라가 대도(지금의 베이징)을 점령하고 융성하였고 몽골의 원나라가 북으로 쫒겨나게 되었습니다.

    신흥 강국 명나라는 고려에게 누구의 편에 설 것인지 재촉하며 압박을 가해왔고 이를 고려가 거절합니다.

    그러자 명나라는 굴복하라는 압박과 무리한 공물요구(처녀와 수재(秀才) 및 환관 각 1천 명과 소와 말 각 1천 마리)를 해왔고 결정적으로 철령위 이북쪽 영역을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이에 최영이 정 이런 식으로 한다면 군사를 일으켜서 명나라를 쳐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고 정벌군을 이끌게 하죠.

    여기 정벌군을 이끌게 한 장수가 이성계였고 이성계는 반원기조를 유지해오던 고려세력의 수장격으로 우왕의 명이니 결국 승락하긴 했지만 줄곧 정벌에 관해서는 반대입장을 보여왔습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위화도 회군 - 나무위키 (namu.wiki)

    결국 정벌군은 편성되어 요동으로 향했고 이성계는 압록강에 위치한 위화도에서 도하를 생각하며 고민고민하다가 발길을 돌려 고려 개경을 향해 돌아옵니다. 이를 위화도 회군이라고 일컫습니다.


  • 안녕하세요. 심각한가마우지119입니다.

    당시 동아시아 세계는 강국이었던 원나라가 대륙에서 흥기한 한족부흥 운동과 오랜 실정으로 점차 쇠퇴하게 되고 한족 부흥운동의 대표자였던 주원장이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건국하며 새로운 분위기가 감돌게 됩니다.

    고려에서는 원나라와 명나라 사이에 양다리외교를 주도하던 권신 이인임 일파가 최영-이성계 등 신흥 무인세력의 쿠데타로 인해 실각하고 이들과 친분을 맺었던 신진사대부들이 국가정책의 핵심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 무렵, 건국 초였던 명나라는 고려에 대한 우위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고려에 조공을 요구하고 더욱이 원나라 때 고려가 무력으로 탈환하였던 철령 이북 지역을 반환하라는 요구를 하며 일방적으로 그곳에 군사기지를 설치하기 시작합니다.

    명나라의 이같은 억지 주장에 최영 등 강경파는 명나라를 무력으로 선제공격하여 고려의 기염을 토하자 하였고 신진 사대부층과 이성계 등은 4불가론(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가망이 없으며, 농사철에 군대를 일으키면 안 되고, 대군을 일으켜 명을 칠 경우 남쪽에서 왜구가 다시 창궐할 것, 또한 장마철에 군사를 일으키면 역병이 돌고 활의 아교가 녹아 싸우기도 전에 자멸할 것!)을 내세우며 외교적인 방법으로 이를 무마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왕이었던 우왕은 최영의 손을 들어 요동정벌을 시도하게 되고 고려의 거의 모든 국력을 쏟아부은 대부대가 요동으로 출정하지만, 총사령관이었던 최영은 우왕의 제지로 이들과 함께 출정하지 못하고 오직 부사령관이었던 조민수-이성계만이 군대를 지휘하여 압록강변 위화도까지 진군합니다.

    계속되는 장대비와 역병의 창궐로 이성계-조민수 등은 회군을 결심하고 여러 차례 왕에게 이를 받아들여줄 것을 요청하지만 오히려 불호령을 맞자, 독자적으로 군대를 돌려 다시 남하하게 됩니다.(위화도 회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