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역사학계에서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원인을 2가지로 파악하고 있다. 하나는 사회적인 모순이고 또 하나는 한때 지역감정으로 남아 있던 서북 지방의 사회 경제적 특징이다.
고려시대의 문벌귀족에서 그 기원을 시작하는 사대부들이 중심이 된 조선시대에 서북 지방은 여요전쟁 등의 북방 민족과의 전쟁에서 최전선으로서 지속적으로 수난을 당해 왔다. 결정적으로 후기에는 몽골의 침략에 아예 직통으로 갈리고 동녕총관부라는 이름으로 편입되기도 하는 등 가루가 되도록 얻어맞았기 때문에 고전적 양반이라는 계층이 생길 여지가 없었다.
당시는 청야 전술이 주된 전술이었기 때문에 농사도 좀 짓고 해서 경제력이 상승하려 하면 전쟁 터져서 다시 갈리고의 무한 반복이었다. 묘청의 난, 조위총의 난, 여요전쟁, 여몽전쟁, 홍건적의 침략 등등 수많은 네임드 사건이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심지어 북방 출신인 태조와 태종 시기부터도 이 지역은 무시당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와 있는 내용에는 "(태조가) 나라를 창건하고는 '서북 지방 사람은 높은 벼슬에 임용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그런 까닭으로 평안도, 함경도 두 도에는 300년 이래로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다"라고 되어있다. 문제는 정작 태조 이성계 자신이 서북보다도 차별받은 동북 지방 출신이므로 그런 명령이 실존했을지는 의문이 크다는 것.
이에 대해서 후에 태조 이름을 팔아서 서북 차별에 정당화한 것이라는 주장[4]이 있다. 세종조의 4군 6진 개척 과정에서 시행된 사민 정책이 시간이 지나 중종 대에 이르러서부터는 죄인의 가족을 서북 지방으로 보내 버리는 형태로 변질되면서 완전히 유배지로 낙인찍혔다. 특히 함경도는 열악한 기후에다 원래 여진족이 다수 거주했던 지역이라는 점과 더불어 과거 영국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본 시각, 혹은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를 본 시각과 비슷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