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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6.13

오스만 투르크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터키 정도로 작아져버린 것인가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역사를 보면 전성기때는 엄청난 영토를 많이 가지고 있었더라고요 모든 나라의 흥망성쇠가 그렇긴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 는 어떻게 그 광활한 영토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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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럽인들을 공포로 몰아 넣었던 오스만 투르크의 기세가 꺾이는 시점은 1683년 빈 전투(Battle of Vienna)로 보는데 역사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를 공격하다 실패한 이후 오스만 투르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추격을 받아 베오그라드와 파노니아 평원의 대부분을 빼앗기게 된다.


    하지만 오스만군은 아직 당대 최강을 자랑했다. 오스만은 곧바로 병력을 재정비해 베오그라드 등 잃었던 영토 대부분을 되찾았다. 이슬람의 대표주자 오스만 투르크와 기독교 세력의 합스부르크는 팽팽하게 맞서며 뺏고 뺏기는 전투를 이어나갔다.


    1697년 오스만의 술탄 무스타파 2세(Mustafa II)가 10만명에 가까운 대병력을 이끌고 베오그라드로 진군했다. 당시 합스부르크 군에는 오스트리아, 독일 제후국, 헝가리의 병사들이 합세했고, 사보이의 오이겐 공작(Eugene of Savoy)이 지휘했다. 기독교 군단은 모두 7만명이고, 그중 당장 전투 가능한 병력은 3만5천이었다.


    외젠 공작은 페트로바라딘 요새 근처에서 회전을 원했지만 술탄은 전면전을 피해 만만한 스제게드(Szeged) 요새를 함락시키려고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진군했다. 오이겐의 군대도 술탄군을 따라갔다. 술탄은 오이겐 공작이 이끄는 합스부르크 군이 뒤따라 온다는 사실을 알고 요새 공성전을 포기하고 겨울을 나기 위해 숙영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사실을 오이겐이 알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군은 오스만군이 숙영지로 가는 길목에 매복을 세웠다. 술탄군은 그 사실을 몰랐다. 9월 11일 술탄군 대병력이 티사 강(river Tisa)을 건너는 도중에 합스부르크 군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강변에서는 강력한 포격이 가해졌고,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가 오스만 군 진영을 포위하고 총격전을 벌였다. 오스만 군은 혼란에 빠져 다리방향으로 퇴각했다. 합스부르크 군은 오스만 군을 적의 허리를 끊고 퇴로를 막았다. 끔찍한 살육이 시작되었다. 오스만 군은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퇴각했다.


    이 전투는 전투가 벌어진 지명을 따서 젠타 전투(Battle of Zenta)라 불린다. 젠타 전투는 오스만군에게 치명적이었다. 합스부르크 군의 사망자는 429명인데 비해 오스만군의 사망자는 3만명에 이른다. 출동 병력의 30% 이상 잃은 것이다. 부상자수는 헤아릴수 없었다.


    젠타 전투는 오스만투르크 쇠락의 서곡이었다. 무스타파 2세는 전의를 상실했다. 2년후 체결된 카를로비츠 조약(Treaty of Karlowitz)에서 오스만 제국은 트란실바니아와 부다(Buda), 에게르(Eger), 카니즈사(Kanizsa) 등 주요 요새들을 합스부르크와 헝가리에게 양도하게 되었다. 오스만이 내준 지방들은 후에 트란실바니아 공국(Principality of Transylvania), 헝가리 왕국(Kingdom of Hungary), 슬로바니아 왕국(Kingdom of Slavonia) 등의 이름으로 합스부르크 영토가 되었다.


    그후에도 합스부르크는 발칸반도로 남하해 오스만 제국은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Treaty of Passarowitz)을 체결해 베오그라드를 넘겨 주었다. 여기에 더해 세르비아의 절반, 루마니아의 왈라키아도 넘겨 주었다.


    이번에는 러시아 제국이 괴롭혔다. 러시아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흑해 연안의 오스만 영토를 공격했다. 오스만 제국은 1768년에서 1774년까지 무려 7년간 러시아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오스만군은 무기력함을 보였다. 러시아 함대는 발트해에서 출발해 대서양을 지나 지브롤터를 거쳐 지중해로 돌아오는 대단히 불리한 여건이었는데도 오스만 해군은 에게해에서 전멸당했다.


    오스만은 패전후 1774년에 체결된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Treaty of Küçük Kaynarca)에서 대국으로서의 체면을 완전히 구겼다. 막대한 배상금은 그나마 약과였다. 오스만 제국과 신민(臣民) 관계를 유지하던 징기스칸의 후예 크리미아 칸국이 제국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한때 정예병이었던 예니체리 군단이 전투력을 상실한 이후 오스만은 크리미아 칸국의 기병들을 차출해 발칸 전투에 투입했었다. 그 전력을 잃게 된 것이다.


    영토도 많이 잃었다. 드네프르강과 부크강 사이의 광활한 영토를 러시아에 내주었고, 흑해에 대한 통제권도 빼앗겼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흑해에서 얼지 않은 항구를 얻게 되어 쉽게 지중해를 드나들게 되었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오스만은 그리스 정교에 대한 통제권도 잃었다. 러시아 황제는 이스탄불에서의 정교회 권리와 예배를 보는 사람들을 보호할 권리도 얻게 되었다. 러시아에는 동로마제국 시절에 그리스 정교가 보급되었는데, 정교의 본고장인 이스탄불(옛 콘스탄티노플)이 종교적 입장에서 오히려 러시아 황제의 명령을 받게 되는 꼴이 되었다.


    러시아와의 패전에서 오스만이 잃은 또다른 것은 카프카즈(코카서스)에서 그루지아(조지아)를 러시아에 빼앗겼다는 사실이다. 북방에서, 동방에서 러시아의 압력을 받게 된 것이다.


    아프리카 영토에서 타격을 받았다. 179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해 아프리카 일대가 준독립 상태로 되었다. 이집트는 나폴레옹의 침공 이후 곧바로 수복되었지만 나일강 유역의 부유한 영토가 이스탄불의 술탄의 지시를 받지 않고 무함마드 알리 파샤와 그의 후손들에게 의해 통치되는 국가내 국가라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이집트의 지배자들은 술탄을 상전으로 모셨지만 조세권과 군권을 획득함으로써 명목상 오스만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이스탄불은 약간의 공납 외에는 이집트에서 조세수입을 더 이상 얻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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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스만 제국은 보수적 성격으로 인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읽지 못한 데다가 무능한 술탄들이 연이어 배출되고 근위대인 예니체리의 전횡이 심해지면서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특히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의 전파가 늦어진 탓에 영토를 하나하나 잃으며 위세가 수축되다가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동맹국의 일원이 되는 악수를 두고 협상국에 패배하였다. 이후, 내부 소수민족 대다수가 독립하고, 그리스에게 국가의 발상지인 아나톨리아의 해안가까지 점령당하며 강대국들의 뜻에 의해 갈라지었다. 튀르크 전체가 열강들의 식민지로 전락할 뻔했으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지휘 아래 기사회생하여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튀르크족의 국민 국가, 튀르키예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1922년 11월 1일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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