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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5

황해도 봉산 지탑리는 선사시대에 어떤 역사적 자료가 되나요?

안녕하세요.


한국사 역사적으로 황해도 봉산 지탑리는


선사시대에 어떠한 역사적인 자료나 시대상의 근거 역할을


하게 되었나요??


무슨 시대와 관련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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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반도에서 농경은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시작되었다.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2지구 2호 주거지에서 피 또는 조로 추정되는 탄화된 곡물과 아울러 돌낫, 돌보습, 갈돌 등이 발견되었다.1) 이것은 대체로 기원전 3000년대2) 또는 기원전 3500년 이전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어3) 한반도 농경의 시작을 알려 주는 자료로 평가 된다. 지탑리 2지구 2호 주거지와 같은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황해도 봉산군 마산리 7호 주거지,4) 신석기시대 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평양 남경 31호 주거지에서도 조가 출토되었다.5) 근래에 부산 동삼동 패총 1호 주거지에서 조와 기장,6) 진양 댐 수몰 지구 내의 상촌리 B지구 및 어은 1지구, 경남 창녕 비봉리 유적에서도 조가 발견되었다.7) 충북 옥천 대천리 유적에서 쌀, 보리, 밀, 조가 출토되었고,8) 한강 하류에 위치한 김포와 일산의 토탄층(土炭層)에서 볍씨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도 있다.9) 이들 보고는 신석기시대 후기에 한반도에서 벼를 재배하였음을 알려 주는데, 현재 학계에서 쌀이나 볍씨가 출토된 층위를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볼 수 있는가를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10) 신석기시대 후기에 벼를 재배하였을 가능성은 열어 둘 수 있지만, 그것을 확증할 만한 유적의 발굴이 더 필요한 실정이다.

    곰배괭이(회령 출토)

    신석기시대의 농기구는 주로 석제(石製)이고 뼈, 뿔, 이빨 등으로 만든 것도 발견되었다. 농기구는 크게 굴지 경작구(掘地耕作具)와 수확구(收穫具)로 분류할 수 있으며, 이 밖에 갈돌과 같은 도정구(搗精具)와 조리구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굴지 경작구에는 보습과 삽, 괭이, 곰배괭이 등이 있다. 돌보습과 돌삽은 신의 바닥 모양이나 유엽형(柳葉形)으로 모양이 서로 비슷하다. 대체로 길이 30∼40㎝, 너비 15∼20㎝ 정도의 소형은 돌삽으로, 길이 50∼60㎝ 정도의 대형은 돌보습으로 분류한다.11) 보습과 삽은 모두 나무 자루를 일직선으로 연결하여 밭을 갈아 흙덩이를 일으키거나 흙을 파는 데에 사용하였는데, 신석기시대에 보습을 사용한 밭갈이는 아직 소나 말 등의 가축을 활용하였다고 보기는 어렵고 인력경(人力耕) 즉 사 람의 힘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괭이는 날과 손잡이 나무자루가 ‘ㄱ’ 자 모양을 이루어서 몸 쪽으로 끌어당기며 작업하는 농기구로, 땅을 일구거나 씨앗을 심을 구멍을 파는 데에 썼다. 아울러 정지 작업(整地作業)이나 제초 작업에도 사용하였고, 야생 식물의 뿌리를 캘 때에도 널리 이용하였다. 현재까지 발견된 괭이는 대부분 석제인데, 서포항과 궁산 패총 유적에서 골제(骨制)가 출토되었다.12) 곰배괭이는 돌괭이와 달리 어깨가 매우 뚜렷하며 날 폭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사용법은 돌괭이와 달리 삽처럼 나무자루를 일직선상으로 연결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자루를 단단히 묶을 수 있어 갈이 작업에서 좀 더 강한 힘을 가할 수 있고, 날이 크고 무겁지 않아 기능 면에서 더 효율적이었다.13) 곰배괭이는 신석기시대 후기에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당시에 경작 기술이 발달하였음을 반영하는 농기구로 추정된다.

    뼈낫(대전 둔산 출토)

    반달돌칼(청원 쌍청리 출토)

    신석기시대에 수확구로서 낫과 반달 돌칼이 널리 사용되었다. 대전 둔산과 궁산 패총에서 멧돼지 어금니로 만든 뼈낫이 발견되었고,14) 지탑리와 암사동 등지의 유적에서 돌낫이 여러 점 출토되었다.15) 낫은 주로 곡물의 이삭을 벨 때 사용한 수확구였지만, 그 밖에도 실생활에 여러 용도로 두루 사용하였다. 낫과 더불어 청동기시대까지 널리 수확구로 사용된 것이 바로 반달 돌칼이다. 웅기 서포항 5기층에서 출토된 조가비로 만든 반달 돌칼 한 점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모두 석제이다. 신석기시대의 곡물인 조, 기장 등은 낟알이 잘 흩어지고 익는 시기가 불규칙하여 이삭을 익는 순서대로 따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신석기나 청동기시대에는 대개 낫보다 반달 돌칼을 수확구로 더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16) 반달 돌칼은 보통 등 쪽에 있는 구멍에 끈을 꿰어 손에 잡고 사용하는데, 주형(舟形), 삼각형, 직사각형 등 다양한 유형이 발견되었다.17) 이 밖에 수확한 곡물이나 견과류(堅果類) 등을 탈각(脫殼)하고 전분(澱粉)을 만들 때 사용한 도정구(搗精具)로는 갈판, 갈돌, 돌공이, 돌절구 등이 있지만 지금까지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 주로 발견되는 것은 갈판, 갈돌뿐이다.

    갈돌과 갈판(강릉 지경동 출토)

    목제 농기구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덤불이나 수풀을 불로 태워서 경작지를 확보하였을 가능성이 높았음을 염두에 둘 때 목제 농기구도 농경에 적극 활용하였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청나라 말기에 윈난 성(雲南省) 남노강(南怒江) 가에 거주하던 독룡족(獨龍族)은 보습, 가래 같은 농기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칼로 나무를 베고 불을 질러 수풀을 태워 경작지를 확보한 다음, 끝이 뾰족한 대나무 즉 굴봉(掘棒)을 가지고 파종할 구멍을 만들고, 거기에 점묘식(點苗式)으로 보리, 피, 기장 등의 씨앗을 파종하여 흙을 다시 덮는 방식으로 경작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농경 방식을 일반적으로 ‘도경화종(刀耕火種)’이라고 한다.18) 『염철론(鹽鐵論)』과 『관자(管子)』 등에 석부(石斧)로 나무를 자르고 불을 질러 파종한다는 내용이 전하는데,19) 이것은 화경(火耕)을 기초로 경작한 정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대체로 한 해 또는 두 해 동안 잡곡을 재배하고, 8년 또는 10년을 경과하여 초목이 무성해져 지력이 회복된 다음에 다시 화경으로 경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20)

    화경에 기초하여 경작할 때에 석부로 나무를 베었고, 불을 지른 후 파종할 때에 주로 끝이 뾰족한 나무막대기(굴봉)나 돌괭이(또는 뼈괭이)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파종에 사용한 나무막대기가 아직 발견되지 않 았지만, 신석기시대 초기 농경에서 가장 필수적인 농기구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돌보습이나 돌삽은 비교적 단단한 토양을 경작지로 활용할 경우에 땅을 일구거나 흙덩이를 파내고 덮는 데에 적절하였고, 곰배괭이는 신석기시대 후기에 그러한 작업의 효율을 배가시키는 농기구로 개발되었을 것이다.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되는 곡물이 조, 기장 등에 국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농사는 잡곡 중심이었을 것이다. 화경에 기초하여 잡곡을 경작한 시기에는 휴경 기간이 비교적 길었고, 토지의 생산성도 아주 낮았기 때문에 생업 활동에서 농경보다 수렵, 채집, 어로(漁撈) 등의 비중이 여전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출처: 우리역사넷 신석기시대의 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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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든든한소쩍새224
    든든한소쩍새22423.05.25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팽이형토기문화는 출토된 유물상에서 볼 때 팽이형토기로서는 이른 시기에 형성된 것이 아닌 것으로, 신석기문화가 소멸된 뒤 약간의 공백기를 거친 뒤에 다시 청동기시대 팽이형토기인이 옮겨와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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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좁쌀은 조, 수수 등 잡곡류입니다.


    벼농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된 것이 맞습니다.


    청동기시대의 농경은 밭농사 중심이었지만 일부 저습지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신석기시대에는 잡곡류 등 밭농사만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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