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은 왕위에 오르고 급서가 된 이유는
예종은 왕위에 오르고 특별한 병이나 사전 징후가 없이 급서 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외척,공신세력에 의해 죽음을 당한건 아닌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갑작스러운 예종의 죽음은 독살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다. 1457년(세조 3)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468년 9월 7일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19세에 수강궁(壽康宮)에서 즉위하였으며, 재위 1년 2개월 만에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즉위 초에는 세조의 유명을 받들어 한명회 · 신숙주(申叔舟) 등 대신을 원상(院相)으로 삼아, 서무를 의결하게 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년)에는 직전수조법(職田收租法)을 제정하였다. 이 해에 남이(南怡) · 강순(康純)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 사형당하였다.
1469년 3월 삼포(三浦)에서 왜(倭)와의 사무역을 금지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각 도, 각 읍에 있는 둔전(屯田)을 일반 농민이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해 6월에 「천하도(天下圖)」가 완성되었고, 7월에는 『무정보감(武定寶鑑)』이 이룩되었다. 9월에 상정소제조(詳定所提調) 최항(崔恒) 등이 『경국대전』을 찬진했으나 반포를 보지 못하고 승하하였다.
예종은 세자로 있을 때인 1466년부터 승명대리(承命代理)로 정치 경험이 있고 세조의 정치방법에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세조처럼 언관(言官)에게 강경한 태도를 보여 언관에 대한 좌천 · 파직 등의 기사를 볼 수 있다. 재위기간이 약 14개월에 불과하여, 이 시기는 세조시대에서 성종시대로 넘어가는 과도적인 시대의 성격을 띤다. 시호는 양도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이고, 묘호는 예종(睿宗)이다. 능호는 창릉(昌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에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예종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예종 독살설은 공식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예종은 승하하기 전날까지 신체가 멀쩡했다고 전하며 예종 자신은 사망 며칠전부터 갑작스럽게 연달아 문안을 받는 등 조선왕조실록에 나와있는 여러 정황들을 볼 때 자신의 병세에 관한 징조를 느낀것으로 보이며 그 예상대로 예종은 즉위 한지 15개월 만에 족질로 급사합니다.
2000년대 이후 들어 더 정확한 사인으로는 고질병이었던 족질로 인해 발에 세균이 들어가 봉와직염이 되었고 그것이 악화되어 폐혈증으로 사망에 이른것으로 추정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예종이 사망했을 때 나이는 만 19세로 조선의 역대 국왕 중에서 타살이 아닌 이유로 사망한 인물 중 가장 단명한 왕입니다. 예종 스스로는 강력한 위기 의식과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 때문에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일들을 억지로라도 이끌면서 심신이 퍽 지쳐있었던 듯 하게 보이고 예종 사후에 왕위를 둘째 조카인 성종이 이어받았으며 성종도 한명회의 사위라는 것이 한명회가 살해했다고 의심 받는 근거인데, 사실 그 외에는 딱히 이렇다 할만한 근거는 없고 과로사를 원인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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