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울은 누가 만들었나요? 알려주십시오
저울은 누가 만들었나요?
저울 (weighing machine)의 역사
저울은 선사시대부터 인류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이집트의 선사시대 무덤에서 분명히 저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BC 5000∼BC 4000년경의 고대 이집트의 벽화나 파피루스에 오늘날의 천칭(天秤)과 거의 같은 저울의 그림이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BC 3000∼BC 2000년경의 메소포타미아나 인더스강 유역지방의 유적에서도 천칭의 일부분이나 여기에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 돌로 만든 분동이 발굴되었다.
특히 이집트의 고대 벽화에 그려진 천칭은 오늘날의 최신 저울에서 가장 정밀도가 높은 천칭과 그 원리와 구조가 똑같다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옛날 처음 만들어진 천칭은 지렛대의 중앙과 양 끝에 옆으로 구멍을 뚫어 이 구멍에 끈을 끼워 묶어서 중앙의 끈은 기둥과 같은 것에 고정시킴으로써 지지점으로 하고, 양끝의 끈에는 각각 접시와 같은 것을 매달아서 분동이나 물건을 올려 놓도록 하였다.
그 후 BC 1500년경 이집트 제18대 왕조의 시대의 유물이나 기록에 의하면, 접시를 매다는 방법 등이 매우 진보된 것을 볼 수 있으며, 발굴된 당시의 분동의 크기를 고려할 때 당시의 저울은 최소한 0.5g 정도의 질량까지 측정하였을 것으로 생각 된다.
그 후 계속 발전된 천칭은 AD 2, 3세기경에는 구멍에 직접 끈을 매다는 대신에 오늘날과 같이 핀으로 중앙의 지점을 지지하였고, 또 중앙에 좌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지시바늘을 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천칭은 주로 귀금속·보석 또는 의약제 등을 계량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그러나 천칭은 계량하고자 하는 물체와 같은 무게의 분동을 필요로 하고 양쪽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튼튼한 지렛대를 필요로 하는 결점으로 인하여 일반화물이나 잡화 등과 같이 큰 물체를 계량하는 데는 적합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발명된 것이 로마저울(오늘날의 대저울)이다. 이 저울은 지렛대에 눈금을 매긴 것으로, 물체의 무게에 따라 추의 위치를 적당히 이동시켜서 균형을 이루는 위치의 눈금을 읽음으로써 무게를 측정하였다. 이와 같은 구조는 무거운 물체도 작은 추로 측정이 가능하여 저울의 발전상 일대 혁신을 가져왔는데, 이 저울은 BC 200년경에 이탈리아의 간바니아나마그나에서 위로(Wiro)가 발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대저울은 BC 77년경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며, 저울의 한쪽 끝에 작은 문자가 씌어 있는데, 이 문자의 뜻으로 보아 표준저울로 생각된다.
15세기경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캠과 진자를 이용하여 물체의 무게를 자동적으로 지시하는 바늘이 눈금판의 눈금에 지시하는 진자식 캠저울을 고안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물체의 무게와 바늘의 회전각 등 설계와 공작상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훨씬 후에야 실용화되었다.
천칭은 저울에 접시와 같이 물건을 올려놓는 것을 매달기 때문에 달린 접시에 큰 물체를 올려 놓는 것은 귀찮고 또한 물체가 접시보다 아주 크면 측정이 불가능하였다. 이를 해결한 것이 17세기경 프랑스의 수학자 G.P. 드 로베르발이다. 로베르발기구는 막대를 핀으로 평행사변형으로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도록 조립한 것으로, 좌우 양편에 걸리는 물체의 무게가 걸리는 위치에 관계없이 똑같이 걸리도록 함으로써 저울의 지렛대의 위쪽에 접시와 같은 짐판을 배치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로베르발 기구를 활용한 저울의 시초가 된다.
이 로베르발의 장점은 그 후 약 100년 후에 L.푸앵소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힘과 스프링의 늘어남과의 관계를 이용한 스프링저울을 고안한 사람은 알 수 없으나 1770년경 영국에서 상거래(商去來)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금속이나 수정의 가는 봉의 휨이나 비틀림이 힘의 크기와 관계가 있는 것을 이용한 토션밸런스도 일종의 스프링저울에 해당되며, 작은 무게를 측정하기 위하여 1750년경에 고안되었다고 한다.
1774년 J.와이엇은 건초(乾草) 등의 대형물체의 무게를 달기 위하여 저울에 고리를 달아서 큰 짐을 달 수 있도록 하였다. 미국의 페어뱅크스형제는 이것을 개량하여 근대적인 판수동저울로 발전시킴으로써 기관차와 같은 아주 무거운 물체도 계량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편, 저울의 정밀도를 높이기 위하여 천칭의 받침점(지점)·중점 및 힘점에 끈을 매다는 대신 금속이나 돌 등으로 날과 날받이를 붙였는데, 이는 18세기 이후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다.
동양에서도 BC 2000년경 황허강[黃河] 유역의 한민족이 도량형제도(度量衡制度)를 이미 실시하였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그 훨씬 이전에 이미 이에 필요한 ‘형(衡)’인 무게를 측정하는 저울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때의 저울도 천칭과 같은 것으로, 그 계량 단위로서의 기준은 곡물의 무게로 하였다.
진(秦)나라 때의 분동에 끈이 달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대저울이 이미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도 현재 국립박물관이나 국립공업시험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유물로서 돌로 만든 저울추, 끈이 달린 천칭이 전하여 내려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선사시대부터 저울이 생활화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