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임경업(1594~1646)은 광해군 10년(1618)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며, 당시 친명반청(親明反淸)의 사회 분위기와 함께 우국충정에 뛰어난 충신이자 무장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심기원(沈器遠, 1587~1644)의 모반 사건과 관련되어 인조 24년(1646)에 친국(親鞫)을 받던 중 김자점(金自點, 1588~1651)의 명을 받은 형리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임경업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내세우며 반청을 표명하여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명망 있는 장군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대내외적 정세에 밝지 못하여 결국 옥사(獄死)하고만 불운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임경업의 불행은 궁극적으로 당시 조선의 정치적 상황에 의한 것이지 결코 개인의 능력 탓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쇠퇴한 명나라와 힘을 합쳐 청나라에 저항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국치를 씻으려 했지만 당시 조선의 상황이 이를 지지해 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민중의 판단은 그를 무능하고 실패한 장군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도리어 민족의 영웅으로 재탄생시키기에 이릅니다.
그는 충의, 지조, 용기의 상징으로 민중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죽음 이후 임경업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고대소설 <임경업전>의 창작과 대중적 수용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묘호란 당시에 청나라 군대가 백마산성의 임경업 군대가 두려워 돌아서 진격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명성을 떨쳤던
조선후기 최고의 무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