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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득한반딧불210
진득한반딧불21023.04.03

임경업 장군은 어떤 업적을 남겼나요?

임경업 장군은 어떤 업적을 남겼나요? 그리고, 조선시대 장군인가요? 고려시대 장군인가요? 예전에 사극에서 봤던 것 같은데. 너무 오래되어서 가물가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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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9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03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 중기의 명장. 이괄의 난을 진압하면서 무관으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청북방어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으며, 조선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백성의 신망을 받았고 명, 청군에도 명성이 높았습니다. 명나라에 망명하여 청나라와 싸우다 생포되었으며, 인조의 요청으로 조선으로 압송되어 형틀에서 장살되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경업 [林慶業]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우리 나라로 쳐들어온 후금 (청나라)을 맞아 백마산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잘 막아냈다. 그 후 청나라가 명나라를 칠 때 참전, 명나라와 미리 내통하여 청나라에 대항하려다가 체포되었으나 금교역에서 탈출하였다. 1643년에 명나라로 가서 명군의 총병이 되어 청나라를 공격하다가 또 다시 포로가 되었다. 좌의정 심기원의 반역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1646년 인조의 요청으로 조선에 돌아와, 임금으로부터 신문을 받다가 김자점의 음모로 죽임을 당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광해군 10년(1618) 무과에 급제한 후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 때에는 의주부윤으로 있으면서

    백마산성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등

    나라를 지키는 일에 주력하였다.


  • 임경업은 조선시대 장군이었다.그는 17세기 청나라의 침략에 대항하여 큰 공을 세웠다.그는 김자점이 고용한 병사에게 살해당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경업은 조선의 무관이자 외교관입니다.

    1624년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1626년 정묘호란시 강화도로 출정, 1633년 명나라에 반란군을 토벌, 1636년 의주부윤에 복직되어 압록강 맞은편에 송골산과 봉화산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백마산성과 의주산성에 청군과 대치하여 청군의 남침이 지체되어 남한산성으로 행차라는 인조대왕을 무사케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경업 장군은 충주 출생으로 철저한 친명배청파 무장인데 1618년 광해군 10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1620년 노송보건관, 1622년 중추부첨지사를 거쳐 1624년 인조 2년에 정충신 휘하에서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되었고 그 후 우림위장, 방답진첨절제사 등을 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좌영장으로 강화에 갔으나 화의가 성립된 후였습니다. 1630년 평양 중군으로 검산성과 용골성을 수축하는 한편 가도에 주둔한 명나라 도독 유흥치의 군사를 감시, 그 준동을 막았고 1633년 청북 방어사겸 영변부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으며 공유덕 등 명나라 반도를 토벌, 명 나라로부터 총병 벼슬 받았습니다. 1634년 의주부윤으로 청북방어사를 겸임할때 포로를 석방했다는 모험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1636년 무혐의로 복직이 되었고 같은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의 진로를 차단하고 원병을 청했으나 김자점의 방해로 결국 남한산성까지 포위가 되었지요. 그 후 청나라가 명나라 군대를 치기 위해 병력을 요청하자 수군장으로 참전했으나 명나라와 내통하여 피해를 줄이게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임경업(1594~1646)은 광해군 10년(1618)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며, 당시 친명반청(親明反淸)의 사회 분위기와 함께 우국충정에 뛰어난 충신이자 무장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심기원(沈器遠, 1587~1644)의 모반 사건과 관련되어 인조 24년(1646)에 친국(親鞫)을 받던 중 김자점(金自點, 1588~1651)의 명을 받은 형리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임경업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내세우며 반청을 표명하여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명망 있는 장군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대내외적 정세에 밝지 못하여 결국 옥사(獄死)하고만 불운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임경업의 불행은 궁극적으로 당시 조선의 정치적 상황에 의한 것이지 결코 개인의 능력 탓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쇠퇴한 명나라와 힘을 합쳐 청나라에 저항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국치를 씻으려 했지만 당시 조선의 상황이 이를 지지해 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민중의 판단은 그를 무능하고 실패한 장군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도리어 민족의 영웅으로 재탄생시키기에 이릅니다.

    그는 충의, 지조, 용기의 상징으로 민중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죽음 이후 임경업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고대소설 <임경업전>의 창작과 대중적 수용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묘호란 당시에 청나라 군대가 백마산성의 임경업 군대가 두려워 돌아서 진격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명성을 떨쳤던

    조선후기 최고의 무신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경업 장군은 16세기 후반 조선시대의 무신이며, 조선시대 장군입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무인 이순신과 함께 일본의 침략을 막은 '명량해전'에서의 활약입니다. 임경업 장군은 이순신과 함께 대장군으로 함께 출격하여, 결국 이순신이 이끄는 함대와 함께 일본 함대를 격파하였습니다.

    이 이외에도 임경업 장군은 조선의 안보를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조선시대 말기에 일어난 '***호란'에서도 뛰어난 전략과 통솔력을 발휘하여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또한, 남한산성의 방어전에서도 뛰어난 전략과 지휘력을 보여주어, 대전에서의 승리와 함께 국내 안보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임경업 장군은 이순신과 함께 일본의 침략을 막은 명량해전에서의 활약으로 유명하지만, 그 이전부터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큰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그의 업적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경업장군은 조선 후기의 장군입니다.

    병자호란때 백마산성을 지켰으나 청과 명에 편에 서서 활동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