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람들은 목욕을 어떻게 했나요?
조선시대 사람들은 목욕을 어떻게 했나요? 비누도 없었을탠데요 물로만 씼었나요 그리고 추운겨울엔 어땠을지 그 시대 생활상이 궁금하네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온천을 이용한 목욕이 이루어졌다. 조선에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언급된 바에 따르면 온양, 유성, 덕산, 수안보, 평산, 동래 등 31개의 온천이 있었다고 한다. 온천은 신분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어서 일반인도 목욕을 즐길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군역의 의무와 노동을 제공하는 요역의 의무 속에 대부분 농사를 지어 세금을 내고 식구들을 부양해야 했던 조선의 서민 남성이나 유교문화권에 살고 있는 조선의 서민 여성에게 온천욕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니 온천이 나오는 주변에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노천에 흘러넘치는 온천물을 이용하는 수준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더 자주, 더 호화롭게 내 몸에 투자할 시간과 비용이 주어지는 기회는 신분계급의 높음과 경제적 여유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왕과 왕비는 몸이 좋지 않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면 도성에 있는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인 행궁에 머무르며 온천욕을 즐기기도 했다. 오늘날도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충청남도 온양의 온천은 물이 워낙 좋다고 소문이 나서 온양행궁이 지어졌는데 그 안에 간단한 국가정무를 돌볼 수 있는 정치기구들까지 설치될 정도였으니 규모 면에서도 제법 격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왕가에서는 온천을 건강증진이나 질병치료에 활용하기 위해 온천물에 약재를 넣어 함께 몸으로 흡수되도록 하곤 했다.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조 등의 왕이 온양행궁을 애용한 것은 실록을 비롯하여 공식적인 기록에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비운의 사도세자가 이곳에서 다리치료를 받으며 건강을 회복하려고 이용했던 기록이 온천일기라는 책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사도세자는 영조 36년인 1760년 다리에 종기가 생겨 치료를 위해 10일간 온양행궁으로 행차했는데, 당시 사도세자의 온천행차와 치료 내역이 『온천일기』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밖에 황해도 평산군에 있는 평산온천도 태조 이성계가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즐겨 사용한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오늘날은 가볼 수 없으니 궁금증만 더할 뿐이다.
출처: 채널예스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씻었을까?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관습으로 드러내놓고 몸을 씻는 행위를 금기시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왕과 왕비 역시 궁내의 비밀스럽고 일정한 장소에서 벌거벗지 않고 목욕했습니다.
양반들은 정방이라는 공간을 따로 두어 그곳에서 몸을 씻었는데 그곳에 나무로 만든 큰 통이 있어 통 안에 들어가 씻는 것이 아니라 통 밖에서 물을 이용해 닦아내는 방식으로 씻었습니다.
궁녀나 나인들은 별도의 목욕시설이 없어 부엌이나 창고에서 물을 끼얹거나 젖은 수건으로 닦는 방식으로 목욕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얼굴을 씻을 땐 곡물가루(쌀뜨물 같은)로 했다고 하며
치아를 닦을 땐 버드나무 가지로 했다고 하네요.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상류 사회에서는 어린애의 피부를 희게 하기 위하여 복숭아 꽃물로 세수시키거나 목욕시켰습니다. 어른은 여자는 물론 남자도 난탕(蘭湯 : 난초 삶은 물)에 목욕함으로써 피부를 희고 부드럽게 하는 동시에 몸에서 향내가 나도록 하였습니다. 청결 관념의 확산으로 조선시대 역시 목욕이 중시되고 대중화하였습니다.
엄격한 도덕률 아래에서도 신라시대에 비롯된 유두(流頭) 민속을 지켜, 음력 6월 보름날이 되면 계곡과 냇가에 가서 목욕하고 물맞이를 하였습니다. 또한, 제례(祭禮) 전에 반드시 목욕재계해야 하는 관습과 백색피부 호상(好尙)으로 인하여 목욕이 성행하게 되었습나다.
따라서 대가에서는 목욕시설인 정방(淨房)을 집안에 설치하였으며, 조두를 만들어 저장하고, 특히 혼례를 앞둔 규수는 살갗을 희게 하기 위한 목욕을 하였습니다. 난탕을 비롯하여 인삼잎을 달인 삼탕(蔘湯), 창포잎을 삶은 창포탕, 복숭아잎탕, 마늘탕, 쌀겨탕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노출을 꺼리는 생활관습으로 인하여 벌거숭이 상태로 목욕하지 않고, 옷을 입은 채로 신체의 부분 부분을 씻어나갔습니다. 이 때문에 대형의 욕조가 불필요해진 대신 대형 함지박과 대야가 다수 제조되었습니다. 한편, 조선시대는 질병치료를 위한 온천 목욕 및 한증도 성행하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목욕풍속은 성문화를 퇴폐시하는 유교사상이긴 하지만 청결을 중시하여 부분목욕문화가 발달한 시기이다. 조선시대에는 개별가옥에 목욕탕이 별도로 없었으며 황실에서도 세수간 나인이 목욕물을 별도로 준비해 올렸다. 궁안과 양반가의 부분목욕문화는 상이하지 않았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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