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이 구해왕에게 진골을 부여했을 때 다른 귀족인 두품들은 반대가 없었나요?
구해왕이 신라의 법흥왕에게 항복을 하고 나서
법흥왕은 구해왕에게 진골이라는 신분을 부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라의 경우 골품제로 인해 두품들에는 관직에도 올라갈 수 있는 상한선이 있었는데
가야의 왕족에게 신라의 진골이라는 신분을 부여했을 때
신라의 두품들은 반대를 하지 않았는지요?
신라에는 화백회의라는 것이 있었는데 구해왕에게 진골이라는 신분을 부여할 때
이또한 화백회의의 의결에 의해서 정해진 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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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답변이 있어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구해는 금관가야의 국왕으로 구형왕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그런데 금관가야는 법흥왕 19년(532년) 때 신라에 복속됩니다. 신라 귀족들은 법흥왕이 금관가야의 왕에게 진골 골품을 부여했을 때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금관가야는 가야 연맹의 핵심이었고, 신라에 항복하면서 국가 재산과 보물을 가져왔습니다. 또한 신라는 가야의 영토와 문화를 습득하고 가야의 귀족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활용하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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