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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호랑이161
심심한호랑이16123.03.22

중국통일한 수나라는 왜 고구려에 졌을까요?

고구려역사를 보면 수나라의 침략에도 끄떡없이 막아내고 나라를 지켜냈는데 중국을 통일한 그 당시 수나라는 작은나라 고구려를 함락시키지 못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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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10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당시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주변 나라에 조공과 충성을 요구하였지만 고구려만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고구려역시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기때문으로 예상됩니다. 당시 고구려왕이었던 영양왕은 중국의 요구를 거부하고 오히려 먼저 요서지역을 공격함으로서 수나라와 갈등이 고조되었습니다.

    해서 수나라는 무려 200만 가까이 되는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는데 그당시 고구려의 군사력은 40만이 되지 않았던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수비하는 입장에서 여러 성벽을 동시에 막으려니 더욱 불리한 상황이었겠지요.

    하지만 고구려는 높은 성벽과 특이한(튀어나온)구조물의 성격과 지형을 이용하여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방어를 성공시켰고 이후 우리들이 익히 아는 유명한 을지문덕 장수가 끊임없이 치고빠지기 밀당 전술을 이용하여 수나라의 힘을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을지문덕 장군은 일부로 지고 있는 척을 하며 거짓 항복을 수나라에 제안하고 수나라역시 상황이 좋지 않아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전쟁에서 대패하여 수나라는 결국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수나라의 양제는 고구려가 큰 힘을 갖자 불안해졌고 고구려는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 시대에 걸쳐 활발하게 정복사업을 펼쳐 랴오둥을 차지하고 한강 이북까지 점령하고 있었고 자신들이 천하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던 양제는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고구려를 꺾어 위엄을 떨치고자 했습니다.

    고구려는 양제의 계획을 눈치채고, 수나라 대군과 정면으로 부딪히기 보다 적이 지칠 때까지 기다렸고 수나라 군사들의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자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길을 잘 모르는 수나라의 군대를 지금의 청천강인 살수로 꾀어냈고 함정에 빠진 적들은 살수에서 거의 죽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결국 수나라의 평양성침공전략이 고구려에게 막혔기 때문인데, 고구려는자신의 국가에서 싸우는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수나라의 엄청난 병력들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유명한 것은 살무대첩입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6400


  •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일어난 배경: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한반도 쪽으로 세력을 펼칠 것을 대비하여 고구려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던 신라가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어 도움을 요청.

    살수대첩

    1. 정의

    12년(영양왕 23) 평양성 부근까지 침략하였다가 후퇴하는 수(隋)의 군대를 고구려가 살수(薩水:지금의 청천강)에서 크게 격파한 싸움.

    2. 과정

    고구려는 4세기 이래로 분열을 거듭하던 중국사회를 통일한 수와 동아시아의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전쟁을 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와 수는 물론 북방의 유목종족들, 서방의 종족들, 백제, 신라 등이 직접 간접적으로 참여한 국제대전이었다. 598년(영양왕 9)에 고구려는 랴오시를 선제공격하고, 수나라의 문제는 수륙양로를 통하여 공격을 가하였으나 패하였다.

    그후 수는 내부의 안정과 군수물자의 수송에 활용하기 위하여 대운하를 파고, 군선을 대거 건조하는 등 고구려를 침략할 준비를 하였다. 고구려 또한 수와의 국경지대를 정탐하고 거란·말갈족 등과 더불어 공격하는 한편, 중국으로부터의 망명자를 받아들이며 은밀히 돌궐과의 연결을 꾀하고자 했다.

    수의 양제는 수레·배 등의 군수물자를 대규모로 제작하는 등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612년에 수륙양면작전으로 고구려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때 24군 가운데 11개 군이 이 수로군 편제이다. 동원된 병력은 모두 113만 3,800명, 군량운반자의 수는 정규군의 배가 되었으며, 군대를 출발시키는 데에도 40일이 소요되었다.

    요동성 전투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수양제는 우중문 · 우문술 등을 지휘관으로 한 30만 5,000명의 별동대를 편성하여 오골성(지금의 봉황성)을 경유,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의 국도인 평양성으로 직공하게 하였다.

    한편 해군은 황해를 건너 상륙작전에 성공한 다음에 패수(지금의 대동강)를 거슬러 올라가 평양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수륙양면작전으로 평양성을 협공하려는 전략이다. 그러나 래호아가 이끄는 수군은 왕제인 고건무가 지휘하는 고구려 군대에 의하여 궤멸되었다.

    육군의 별동대는 고전하면서도 을지문덕의 유인작전에 걸려 평양성 30리 지점에까지 진군하였다. 그러다가 지휘부 내부의 불화, 물자부족 등으로 수군은 전력이 약화되었다. 을지문덕은 때를 기다리다가 거짓항복을 청함으로써 수군이 퇴각할 구실을 만들어 준 다음에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퇴각하는 수군이 살수를 건너고 있을 때 집중적으로 배후공격을 하여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요동성까지 살아간 병력은 겨우 2,700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3. 결과

    살수대첩으로 인하여 전쟁은 고구려의 대승리로 끝이 났다. 수나라는 그후 613년과 614년에 거듭해서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지만 모두 실패하였고, 오히려 이로 말미암아 수 내부의 동요가 일어나 종말을 재촉하고 말았다. 한편 고구려는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의 위치를 신장시켰으나 많은 국력을 소모하였다.


  • 안녕하세요.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가 고구려에 패배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수나라의 군사력이 상대적으로 약했습니다. 당시 수나라는 다양한 지방의 군대와 언어, 문화, 지리적 차이 등으로 인해 군사력이 통일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반면 고구려는 군사력이 매우 강했으며, 철기시대에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방패와 칼, 철로 만든 갑옷 등의 첨단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계략과 간행 등으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 방식은 전장에서의 진정한 전투보다는 고구려의 목숨을 노리는 전략적인 계략이나 반란을 일으키는 것에 더 초점을 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군사들에게 불신을 조성하고, 전투의 열기를 떨어뜨렸습니다.


    셋째,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지리적으로 불리했습니다. 당시 수나라는 고구려의 영토 북동부와 인접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 지역은 한라산과 같은 산이 많은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군사적으로도 방어적인 위치였습니다. 이에 반해 수나라는 인접한 지역에서 공격을 시도했으며, 고구려의 지형적 이점을 무시하고 전투를 벌이다 보니 전략적인 불리함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수나라는 고구려에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그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군대는 수나라 군대였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철기군도 만만치는 않았지요

    물론 수적으로 열세였습니다. 하지만 수나라는 원정군이고 그렇게 많은 군대가 공격을 하려면 보급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노려 고구려는 청야전술(모든것을 없앰)으로 적의 보급로를 끊고 사기를 꺽는데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에는 을지문덕이라는 명장이 있었습니다. 수비의 이점을 적극 활용하여고 전략 전술의 승리였다고 생각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615년에도 양제는 고구려 원정을

    계획하였으나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수의 약화를 틈타 강성해진

    돌궐이 수를 위협하는 형세였으므로,

    고구려 원정 계획은 취소되었다.

    이미 수 제국 자체가 무너져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618년(영류왕 1)에 양제가 피살됨에 따라 수는 사실상

    멸망하였다.


    십여 년에 걸친 고구려와 수와의

    전쟁이 끝난 뒤, 수 제국은 고구려 원정 실패가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멸망하고 중국은 다시 당분간 분열상을

    나타내었다. 몽고 고원의 유목민

    국가들은 세력을 회복하여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한 가운데

    고구려는 독자적인 세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으며, 반도 내의 삼국

    간에는 전쟁이 계속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수나라가 거대 제국이었던 것은 맞지만 고구려에는 을지문덕이라는 위대한 명장이 있어서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수나라의 침략을 막아냈습니다. 여수장 우중문이라는 시에서 보듯이 수나라 장수인 우중문을 높여주면서도 을지문덕 자신의 기개를 드높이는 모습에서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00만대군을 살수대첩으로 몰살시킨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한도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가장 큰건 군사적으로 약했다는 겁니다. 고구려는 훌륭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나라는 전투 경험이 많은 안시성(安市城) 박정부(朴正夫)에 의해 지휘되는 숙련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외교적인 압박도 이유입니다. ^^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수나라는 589년에 중국을 통일한 이후, 북쪽으로 진출하면서 고구려와 군사적 충돌을 겪게 되었습니다.


    수나라는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구려에 대한 침공을 시도했지만, 결국 고구려의 저항과 체계적인 방어체계로 인해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고구려는 철제 무기와 강력한 기병 부대, 그리고 체계적인 방어체계를 바탕으로 수나라의 침공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수나라와 고구려 간의 군사적 충돌은 단순히 군사적인 문제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수나라와 고구려는 서로 다른 문화와 철학,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군사적 충돌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또한, 수나라와 고구려 간의 군사적 충돌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일어난 일로, 이후에는 서로 경계심을 늦추고 교류를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류는 후대 중국 문화와 한국 문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