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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때까치29
굳센때까치2923.09.01

장녹수로 인해 연산군과 당시 조정은 어떻게 망하게 된 것인가요?

기생이고 후궁으로 궁에 입성한 장녹수로 인해 조선시대 임금인 연산군과 당시 조정은 어떻게 망하게 된 것인가요? 장녹수의 만행에 대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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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9.0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종종반정이 성공하면서 연산군이 폐위가 되었고

    장녹수 또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장녹수가 궁궐에 들어간 후

    장녹수는 연산군을 젖먹이 다루듯 하였지만, 연산군은 그녀를 무척 총애하여 모든 상벌이 장녹수의 영향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1503년 연산군은 장녹수를 숙용에 봉했습니다.

    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형부 김효손에게 함경도 전향 별감 등의 벼슬을 주게 하였습니다.

    장녹수가 궁 안에 살고 있는데도 그녀의 집을 새로 짓기 위해 민가를 헐게 하였으며, 동지중추부사 이병정(李秉正)은 장녹수의 집 하인에게 크게 모욕을 당했지만 오히려 사재를 털어 뇌물을 바치고서야 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1505년 12월에는 장녹수의 치마를 밟았다는 이유로 하급 기생인 운평에 속하는 옥지화를 군기시 앞에서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취홍원, 뇌영원에 돌려 보이고, 연방원에 효시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장녹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데 이용했습니다.

    1506년 1월에는 내수사의 여종이었던 언니 장복수와 조카들을 면천해 양인의 신분으로 올렸습니다.

    그러나, 장녹수의 영화는 같은 해 9월 2일 중종반정으로 그 빛을 잃고 만다.

    장녹수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중종반정이 성공하고 연산군이 폐위된 후, 반정군들에게 붙잡혀 군기시 앞에서 참형(斬刑)을 당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참수당한 그의 시체에 돌을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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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장녹수는 연산군의 12번째 후궁으로,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1년 만에 후궁으로 들어왔습니다. 장녹수는 미모와 지혜가 뛰어나 연산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점차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장녹수는 자신의 권력과 재물을 위해 사리사욕에 빠졌으며, 연산군을 부추겨 폭정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또한, 장녹수는 연산군의 숙부와 외척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조정에 등용시켰습니다.


    장녹수의 전횡으로 인해 조정은 혼란에 빠졌으며, 백성들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로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폐위되었고, 장녹수는 참수당했습니다.


    연산군과 당시 조정이 장녹수로 인해 망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장녹수의 권력과 재물에 대한 탐욕

    장녹수는 자신의 권력과 재물을 위해 사리사욕에 빠졌습니다. 장녹수는 연산군을 부추겨 폭정을 일으키게 했으며, 자신의 측근들을 조정에 등용시켰습니다.


    연산군의 숙부와 외척들의 제거

    장녹수는 연산군의 숙부와 외척들을 제거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따라 조정은 혼란에 빠졌으며, 백성들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에 대한 반발

    장녹수의 전횡으로 인해 백성들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로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폐위되었고, 장녹수는 참수당했습니다.


    장녹수의 전횡은 조선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를 가져온 사건 중 하나로, 조선왕조의 위기 상황을 초래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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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궁궐에 들어 온 장녹수는 본격적으로 연산군의 마음을 흔들었다. 장녹수는 연산군을 때로는 어린아이 같이 때로는 노예처럼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연산군은 장녹수에게 깊이 빠졌는데, 화내는 일이 있더라도 그녀를 보면 즉시 희색(喜色)을 띨 정도였다. 장녹수는 요사스러운 행동으로 연산군의 실정(失政)에 기름을 부었다.

    왕의 총애를 등에 업은 장녹수는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다. 그녀는 남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았으며, 각종 뇌물과 인사 청탁을 받았다. 그녀 덕분에 장녹수의 주인이었던 제안대군의 장인 김수말(金守末)은 계속해서 벼슬이 올라갔는데4), 이는 “왕이 이때 한창 장녹수를 사랑하여 그 말이라면 모두 따랐기 때문에 특별히 승서(陞敍)한 것이다5)”라는 실록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장녹수의 형부 김효손(金孝孫)도 함경도 전향 별감(傳香別監)에 제수되는 혜택을 받았다6). 1502년(연산군 8)~1503년(연산군 9) 무렵에 이르러서는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빠져 날로 방탕이 심해지고 포악한 짓을 많이 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할머니 인수대비(소혜왕후)는 크게 근심하였다.

    할머니의 근심 어린 충고를 듣지 않고, 연산군은 장녹수를 더욱 가까이 하였다. 장녹수는 입궁한 직후인 1502년(연산군 8)에 종4품의 숙원(淑媛)으로 있었는데, 이듬해에는 종3품의 숙용(淑容)에까지 올랐다7). 궁녀로 들어와 초고속으로 승진한 셈이었다.


    품계가 올라간 장녹수는 더욱 권력을 남용하였다. 장녹수는 궁 밖의 사가(私家)를 재건하기 위해 민가를 헐어버리게 하였으며8), 모습이 고운 두 여인을 시기하여 두 사람의 부자 형제(父子兄弟)를 하루아침에 다 죽이게도 했다9). 옥지화(玉池花)라는 기녀는 장녹수의 치마를 한 번 잘못 밟았다가 참형을 당하기까지 했으니10), 장녹수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녀의 위세를 믿고 장녹수의 하인들마저 행패를 부렸다. 동지중추부사 이병정(李秉正)의 경우 장녹수의 집 하인에게 크게 모욕을 당했는데, 오히려 사재를 털어 뇌물을 바치고서야 화를 피할 수 있었다11).


    사정이 이쯤 되니 모두가 출세하기 위해 장녹수 앞에 줄을 서게 되었다. “무뢰(無賴)한 무리들이 장녹수에게 다투어 붙어 족친(族親)이라고 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12)”는 표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장녹수와 그 측근들의 횡포로 인해 백성들의 원망은 높아졌고, 결국 연산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1506년(연산군 12) 8월 23일. 연산군은 후원에서 나인들과 잔치를 하다 시 한 수를 읊었다. “인생은 풀에 맺힌 이슬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 읊기를 마치자 연산군은 갑자기 눈물을 두어 줄 흘렸다.


    다른 여인들은 몰래 서로 비웃었으나, 장녹수와 전비(田非, 숙용전씨, ?~1506)는 슬피 흐느끼며 눈물을 머금었다. 연산군은 장녹수와 전비의 등을 어루만지며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불의의 변이 있겠느냐마는, 만약 변고가 있게 되면 너희들은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13)”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앞날을 예견하였던 것일까? 이날은 바로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열흘 전이었다.


    장녹수는 연산군 폭정의 핵심이었던 만큼, 중종반정을 성공시킨 세력은 온갖 비난의 대상이었던 장녹수 체포에 나섰다. 반정군들에게 붙잡혀 군기시(軍器寺) 앞에 끌려온 장녹수는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길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시체에 기왓장과 돌멩이를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은 “일국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고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을 정도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14).


    장녹수가 빼앗아 쌓아두었던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으며, 장녹수의 하인들은 전일에 기세를 믿고 남의 집 재산을 빼앗기도 하고 사람을 때려 다치게 했다는 죄목으로 형벌을 받았다15).


    그리고, 대간들은 기생인 장녹수와 전비의 사례를 들어 이를 경계하고 나라에 예법을 세울 것을 간하였다.

    기생에서 후궁의 반열에 올라 연산군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던 장녹수. 독재정치로 종말을 향해 치닫던 연산군의 말년 치세, 그녀는 왕의 광기를 거의 유일하게 제어할 수 있는 존재였지만 그녀의 선택은 연산군의 음탕한 생활과 악행을 더욱 부추기는 것이었다.


    정국은 독재와 공포로 이어졌고, 반정의 순간 장녹수는 연산군 정권의 실질적인 2인자였다.


    인과응보였을까? 결국 장녹수는 길거리에서 돌무더기에 깔려 온갖 비난을 받으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드라마 <장녹수>의 주제가처럼 ‘부귀와 영화도 한 편의 꿈이 되었던’ 장녹수의 삶은 후대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출처 : 인물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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