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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18

조선전기의 교육기관에 대해 궁금한게 있어서 문의드려요

조선전기에 대표적인 교육기관인 성균관은 어느정도 알고 있는데요. 지방에 설치된 향교?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그리고 현재에도 향교가 남아있다고 언뜻 들은거 같은데 존재하는지도 궁금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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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향교(鄕校)는 지방 사립교육기관으로써 고려, 조선시대에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의 국립 교육기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에 1교씩 설립운용하였습니다. 또한 향교는 성균관의 축소판으로서 공간적 구조는 성균관과 유사하며 사회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향교에 입학할 수있는 자격은 양반의 자제 또는 향리로서 16세 이상 40세 이하를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향교에서 교육하는 내용들은 4학과 같은 중등교육의 수준으로 소학, 사서오경이 중요한 내용이었고, 그 밖에 근사록, 제사, 여씨향약, 정속2륜행실 등을 가르쳤다고합니다.

    향교는 지방장관인 관찰사(감사)와 수령이 맡았고 선조19년(1586)에는 중앙정부에서 전국 각도에 제독관을 파견, 향교를 독학하고 제생을 교도하는 등 지방교육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잦은 병화와 재건할 재력이 부족하여 16세기 중엽이후 서원의 번창으로 그 기능이 위축되었고 또한 향교 자체내의 폐단으로 국민의 신망을 잃게 되어 향교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대정향교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3126-1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향교이며,1971년 8월 26일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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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향교는 조선 시대에 나라에서 세운 지방 교육 기관이다. 지방의 학생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면서 선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성균관과 함께 조선의 교육을 맡아 했던 곳입니다.

    지방에 공립 학교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고려 시대였다. 이전 시대에는 주로 임금이 있는 도성에 학교를 세웠으나, 고려의 제17대 임금인 인종 때부터는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유능한 학자들을 파견해 유학을 가르치도록 했다.

    그러나 향교가 지방 교육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조선 시대였다. 조선은 통치 이념이기도 한 유학 교육을 위해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을 세운 뒤 지방에 향교를 설립했다. 한양에도 네 개의 향교, 즉 사학이 만들어졌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고을마다 하나의 향교를 세우라고 했을 정도로 교육 기관 설립에 정성을 기울였다.

    이렇게 고을마다 설치된 향교는 공자와 여러 유학자들을 모셔 제사 지내고, 지방의 유생들을 교육시키는 공립 학교로 자리를 잡았다. 조정은 향교에 ‘학전’이라고 부르는 땅을 주고, 학전을 일구어 거둔 세금으로 학교의 운영비를 충당하도록 했다.

    향교 교육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감독하는 일도 꼼꼼하게 관리해, 향교 교육의 성과는 수령을 평가할 때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향교 교육이 발달할 수 있었던 데에는 과거 제도도 한몫을 했는데, 향교는 물론 수령까지 나서 많은 급제자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향교는 임진왜란 때 큰 타격을 받았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사림들이 세운 사립 학교인 서원이 등장해 위축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향교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사람은 과거 시험을 보지 못하게 하는 방안까지 내놓았으나, 서원에 밀리는 현상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 제도가 폐지되면서 사실상 이름뿐인 존재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향교 - 조선 시대에 유학 교육을 위해 지방에 세운 공립 학교 (한국사 사전 1 - 유물과 유적·법과 제도, 2015. 2. 10., 김한종, 이성호, 문여경, 송인영, 이희근, 최혜경, 박승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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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든든한소쩍새224
    든든한소쩍새22423.04.18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현대의 향교>

    2013년 기준 한국 내 234개 향교가 있다. 현재 남아있는 한옥 중 상당수가 절이나 향교인지라 예외가 있지만 도시 근교에 '민가'스럽지 않은 한옥이 보이면 높은 확률로 향교다. 보통 대문에 커다란 태극이 그려진 것도 특징.


    234개 향교가 모두 잘 보존되어 온 것은 아니고 개화기 과거 시험 철폐 이후 기능이 정지하고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며 상당수 훼손되어 2013년 현재도 복원사업 중이다. 때문에 건축 문화재로서의 위상은 상당수가 낮은 편. DMZ 안에 있는 향교를 포함하여 양구향교, 철원향교, 고성향교, 개성향교, 연천향교, 평강향교, 금천향교, 연안향교, 해주향교, 평양향교 등 남한과 북한 모두 수많은 향교가 전쟁 중에 소실되었고, 새마을 운동 때에도 제주향교 명륜당 같이 사라진 향교도 있다.

    -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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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나라에 세운 지방 교육 기관으로 지방의 학생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면서 선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지방에 공립학교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로 이전 시대에는 주로 임금이 있는 도성에 학교를 세웠으나 고려의 제 17대 임금인 인종때부터는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유능한 학자들을 파견해 유학을 가르치도록했습니다.

    그러나 향교가 지방 교육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것은 조선시대로, 조선은 통치이념이기도한 유학 교육을 위해 성균관을 세운 뒤 지방에 향교를 설립합니다.

    밀양 향교, 나주향교, 강릉 향교 등은 조선시대 향교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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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 성균관은 국가에서 관리를 양성하기 위해 교육하던 최고 기관으로, 오늘날 최고 국립대학과도 같은 성격의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즉 지금으로 따지면 서울대학교에 해당 합니다. 향교는 유학 교육을 위해 지방에 설치한 관립 교육 기관이구요. 향교의 운영은 그 고을의 수령(守令)이 맡았기 때문에 대부분 수령이 통치하는 관아(官衙) 와 가까이 있었다고 합니다. 향교는크게 문묘(文廟)와 학교의 두 공간으로 나누어지며, 그 사이에 담을 쌓아 구분합니다. 문묘에는 중앙에 공자의 위패(位牌)를 모신 대성전이 있고, 양 옆으로는 선현(先賢)들의 위 패를 모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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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향교는 시문(詩文)을 짓는 이른바 사장학(詞章學)과 유교의 경전을 공부하는 경학(經學)을 교과내용으로 한다. 경학은 경전뿐만 아니라 사서(史書)를 함께 공부하였다.

    이렇게 관인후보자를 양성하기 위한 향교교육의 내용은 제도적으로 과거제와 일정한 관계를 갖도록 되어 있었다. 향교에 일정기간 출석한 자에 대하여 과거 응시자격을 부여하는 원점법(圓點法)의 적용이 그 예이다.

    또한 향시의 예정 합격인원을 도별로 제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표2〕는 향시의 도별 합격예정자의 수와 향교의 정원수를 대비한 것이다. 〔표2〕와 같이 서울과 지방과의 향시 합격률에는 차이가 난다.

    [표2] 향시의 합격예정자수 및 향교정원

    구 분관시(館試)한성부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평안황해함경계합 격
    예정자수문과시
    생원시
    진사시
    5040
    200
    20020
    60
    6025
    90
    9025
    90
    9030
    100
    10015
    45
    4515
    45
    4510
    35
    3510
    35
    35240
    700
    700향 교 정 원2004001,7702,1002,3502,8701,2402,1601,1401,32015,330주 : 1) 한성부의 향교 정원은 4부학당의 정원임.
    2) 각도의 향교정원은 경국대전과 각 군현의 향교 정액을 토대로 산출한 것임.

    서울의 4부학당 정원 400명에 생원·진사 초시 합격예정인원 400명은 100%합격을 보이고 있는 반면에 각도 향시의 경우는 7%내외의 저조한 합격률을 보여준다. 향교가 관인양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의 기능이 있다고 해도 그 문호라는 것은 지배신분인 양반 신분이 집중되어 있는 한양과는 그 격차가 큰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현상은 또한 기층신분인 평민들에게 교육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일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향교의 교과과정은 생원·진사의 시험과목을 통하여 유추해 볼 수 있다. 『경국대전』에는 생원초시의 시험과목이 오경의(五經義)·사서의(四書疑) 2편(編)이며, 진사초시에는 부(賦) 1편, 고시(古詩)·명(銘)·잠(箴) 중 1편을 짓게 되어 있다. 복시(覆試)의 경우도 초시의 것을 되풀이한다. 사장(詞章)인 제술(製述)과 경학공부를 병행하도록 시험이 출제되었던 것으로 보아, 향교교육도 이에 준하였을 것이다.

    또한 세종이 “15일 동안은 시문을 제술하고 15일 동안은 경서와 제사(諸史)를 강독하게 하며, 제술과 강론에서 우등한 자는 5인씩 녹명(錄名)하여 예조에 보고하여 바로 생원회시에 응시하게 한다.” 고 한 자료는 대체로 향교교육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경국대전』 장려조에는 “교생으로서 독서한 일과를 매월말에 수령이 관찰사에게 보고하면 관찰사가 순행하여 고강(考講)하고, 영에 따라 권장함을 문부(文簿)에 기록하였다가 교관이 전최(殿最)할 때에 그의 월과·일강을 빙고하여 우등한 자는 호역(戶役)을 헤아려 감한다. ”는 내용을 통해서도 향교에서의 공부내용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찰사의 고강에 낙강한 교생은 교생신분을 박탈당하였다.

    양란 이후에 등장한 납속면강첩은 고강을 통하여 교생으로부터 박탈되는 것을 납속으로 면제받고자 한 것이었다. 한편 교생들이 강습한 교재는 『소학』, 사서오경을 비롯한 제사와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등으로 성균관이나 서원의 그것과 크게 차이는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학』과 『가례』는 조선 초기부터 교생들에게 권장된 책으로서, 각종의 고강이나 과거의 시험과목으로 부과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향교는 교육용 서책의 부족을 심하게 겪었고, 이는 향교교육 자체를 곤란하게 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접기/펼치기건물의 구성과 배치

    향교의 배치는 배향공간과 강학공간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누어지고, 이 밖에 일부 변형된 방법들도 쓰이고 있다. 향교가 자리잡은 대지가 평지인 경우는 전면이 배향공간이 오고 후면에 강학공간이 오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이루고, 대지가 구릉을 낀 경사진 터이면 높은 뒤쪽에 배향공간을 두고 전면 낮은 터에 강학공간을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룬다.

    그러나 밀양향교(密陽鄕校)에서처럼 동쪽에 강학공간을, 서쪽에 배향공간의 두는 예외적인 배치법도 있다. 평지에 건축된 나주향교(羅州鄕校)의 배치와 평면을 살펴보면, 이는 전묘휴학의 배치로 남쪽 정문인 외삼문(外三門)을 들어서면, 배향공간의 중심으로 출입하는 정문인 내삼문(內三門)까지 직선의 길이 나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대성전(보물, 1963년 지정)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대성전에는 공자(孔子)의 위패를 비롯하여 4성(四聖)과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일반적으로 향교에서는 대성전 앞, 동과 서 양쪽에 공자의 제자들과 현인들의 위패를 모시는 동무와 서무가 건축되나, 이곳에서는 그 자리만 남아 있다.

    대성전 뒤로는 담장을 쌓아, 그 뒤쪽에 있는 강학공간과 구분하였고, 대성전과는 동쪽 모서리에 만든 샛문으로 출입하고 있다. 강학공간은 대성전의 중심축상, 제일 안쪽으로 중심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을 두고, 그 앞 동쪽과 서쪽에 학생들이 공부하고 숙식하는 동재와 서재를 두고 있다. 명륜당은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심건물을 두고 그 양쪽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되는 건물을 약간 사이를 띄워 건축하였다.

    동재와 서재는 좌우대칭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반으로 전면 반칸은 툇마루이고 나머지는 모두 온돌방이다. 동재 앞쪽에는 비각이 있고, 동쪽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림을 맡아 해주는 교직사(校直舍)가 자리잡고 있다.

    다음으로 구릉지에 건축되어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는 영천향교(永川鄕校)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쪽 제일 앞쪽으로 누문인 풍화루(風化樓, 정면 3칸, 측면 2칸 중층)가 있고, 이 누의 아래층에 낸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명륜당이 있고, 그 앞쪽 양쪽에 동재와 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중앙에 큰대청(정면 3칸·측면 3칸)을 두고 그 좌우 양쪽으로 온돌방(1칸×3칸)이 하나씩 있다.

    동재와 서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대청(1칸×2칸)과 온돌방(1칸×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륜당 뒤쪽 높은 곳에는 내삼문이 있고 이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배향의 중심전각인 대성전이 서 있으며 그 앞 동서 양쪽에 동무와 서무가 자리잡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내부는 통간(通間)으로 되어 있으며, 동무와 서무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밀양향교에서는 외삼문을 들어서서 동북쪽으로 진입하면 풍화루가 자리잡고 있고, 이 누의 아래층에 있는 삼문을 통하여 명륜당 마당에 이른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는 온돌방(1칸×1.5칸)을 하나씩 두었으며 앞에 반칸 너비의 툇마루를 두었다.

    명륜당 남쪽 동서 양쪽에는 동재와 서재가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남쪽에서부터 마루(1칸)·온돌방(2칸)·대청(2칸)·온돌방(1칸)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배향공간은 명륜당 뒤쪽에 자리잡은 것이 아니라 명륜당 서쪽 터에 있어 명륜당 앞마당을 돌아 들게 되어 병렬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

    대성전의 정문인 대정문은 정면 9칸 측면 1칸의 장방형 평면을 이루는 회랑에 삼문을 만들어 강릉향교의 대성전에서와 유사한 모습을 이루고 있다. 정면 높은 터에 남향한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통간이며 이의 앞쪽 동서로 자리잡은 동무와 서무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향교의 배치는 평지에서는 전묘후학이고 구릉지에서는 전학후묘가 일반적이나 때로 배향공간과 강학공간이 나란히 배치될 때도 있다. 또 각 건물의 평면을 살펴보면 강당은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로 온돌방을 두며, 동재와 서재는 온돌방과 대청 또는 온돌방만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성전과 동·서무는 통간의 장방형 평면을 이루며 내부의 바닥은 전바닥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일반적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배향공간과 강학공간 이외에 향교의 살림을 맡는 교직사는 부엌·방·대청·광 등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일반 민가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 공간은 강학공간과 가까이 배치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존경각(尊經閣)은 방형(方形)의 단일평면을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고 때로 동무나 서무의 한 곳을 존경각으로 할 때도 있으며, 이 때에는 존경각이라 하지 않고 경판고(經板庫)라 부른다.

    향교건축의 구조양식은 대성전·동무·서무·명륜당·동재·서재 등 개별 건물들이 일률적으로 하나의 건축구조양식을 이루지 않고 대략 세 가지 양식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 주심포(柱心包)양식, 익공(翼工)양식, 그리고 민도릿집양식이 일반적으로 대성전은 주심포양식(예 : 강릉향교대성전·장수향교대성전·나주향교대성전)과 익공양식(예 : 안성향교대성전·온양향교대성전)으로 나누어진다.

    동무와 서무는 익공양식이 주류를 이룬다. 다음 명륜당은 익공양식이 주류를 이루고 동재와 서재는 익공양식과 민도릿집양식으로 건축된다. 한편 교직사는 일반주택과 같은 공간구성을 하고 있는 만큼 민도릿집양식을 이루고 있으며 존경각은 익공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상에서 고찰한 주심포·익공·민도릿집 등의 기둥구조양식 이외의 다른 구조상의 요소들, 즉 기단·초석·창호·지붕 등은 모두 어떤 일정한 양식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각마다 다양하게 구성됨으로써 일반 건축물에 나타나 있는 모든 양식들을 볼 수 있다. 향교는 선현의 배향과 학생의 교육인 강학을 기능으로 하는 만큼 이 두 공간이 전체에서 핵심공간이 된다.

    그리고 이들 두 공간 중에서도 선현의 배향공간을 우위에 둠으로써 대성전이 항상 명륜당보다 우위의 위치에 오는 것은 사학(私學)의 서원에서와 같다.

    그러나 서원에서는 평지라 하더라도 대성전에 해당되는 사당을 대지의 가장 안쪽에 두어 신성시하는 것과는 달리 향교에서는 그것을 강학공간의 앞쪽에 두어 전체 공간에 있어 우위에 있게 하고, 구릉지에서는 반대로 강학공간보다 높은 터에 두어 고저 차이로 우위에 있게 하는 것이 특색이다.

    또 배향공간을 우위에 두는 방법은 배치에서뿐만 아니라 구조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즉 대성전은 주심포건축이 주류를 이루고 명륜당은 익공건축이거나 민도릿집 계통인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또 배치에 있어 중심공간이 배향과 강학의 두 공간은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균형을 이루어 공간에 어떤 위엄을 가지도록 한 것이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사찰배치가 비좌우대칭균형을 이루는 것과 다른 점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때에는 역시 비대칭균형을 이룸으로써 우리 나라 전통건축의 공통적인 배치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남한에 남아있는 향교는 1900년에 창설된 오천향교(鰲川鄕校)를 끝으로 231개의 향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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