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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영앙129
편안한영앙12923.04.19

히틀러가 유태인을 대량 학살하게된 원인이 무엇인가요?

옛날에 고딩학교때 음악시간에 유태인학살하는 그런 영화를 봤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서 진짜 히틀러가 유태인을 대량으로 학살했던 이유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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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19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세간의 비난을 받기 쉬운 학살을 정당화 시키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유대인들은 신을 살해한 자들'이라고 매도했고, 그 매도를 진실로 받아들인 사람의 기록이다. 유대인을 예수를 살해한 자라고 비난한 건 아돌프 히틀러가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히틀러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많은 발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1941년에 그는 나치 중위들에게 “기독교적 세계관과 게르만 영웅적 세계관 사이에는 풀 수 없는 모순이 있다. 그러나 이 모순은 전쟁 중에는 해결할 수 없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라고 발언을 하며 전후 기독교의 체계적인 말살을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남겼다.


    또 나치 신문 편집자였던 한스 지글러에게 히틀러는 "당신은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비종교적이다. 나는 그것을 비기독교인이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라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히틀러가 무신론자였다는 증언도 있다.오토 슈트라서와 히틀러의 친구 에른스트 한프슈팅글은 히틀러가 무신론자였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정치세계에서 무신론자임을 드러내는 건 정치적으로 큰 리스크였고, 이 둘은 히틀러와 후에 척을 진 인물들이기에 그의 이미지를 깍아먹기 위해서 과장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히틀러의 예수에 대한 이해는 굉장히 괴상했는데, 그는 예수를 유대인과 맞서 싸운 아리아인이라는 시각을 가졌다. 실제로 1921년 4월 연설에서 히틀러는 예수를 금발벽안이라고 주장했으며, 1922년 11월의 연설에서는 예수를 게르만인이라고 주장했다. 또 히틀러의 측근 오토 바게너에 따르면 히틀러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의 시신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무덤에서 고의로 숨겨졌다고 발언하여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부정하였다.

    출처: 나무위키 아돌프 히틀러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히틀러를 보좌했던 책사로 유명한 괴벨스가 주도하여 유태인을 대량학살하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물게 되어 경제적인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고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한 원인을 유태인에게 돌리며 유태인에 대한 혐오를 극대화합니다. 무려 600만명의 유태인들이 히틀러와 괴벨스 그리고 아이히만 등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스티브스필버그의 작품 쉰들러리스트는 이를 잘 증명해보이는 영화입니다.




  •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한 이유

    히틀러가 유대인을 경멸하고 대량학살 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그가 유대인을 대량학살 했는지에 대해선 크게 궁금해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후에 세계 유럽인들도 유대인을 경멸한 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궁금증은 생겨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1차 세계대전때 독일에 충실히 협조하여 누구보다 열심히 맞서 싸웠고 독일의 산업등의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그들은 독일에 대하여 어떠한 정치적, 종교적인 대립 의식조차 없었는데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들이 이토록 잔인하게 죽임을 당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 유럽인의 반유대주의



    신약성서에서는 '유대인'을 '네 아비인 악마'의 자식으로 일컫거나 '사탄의 유대교 회당'이라고 언급한 사례가 많다. 유대인들에게 따라다닌 별칭은 독사, 모사꾼, 웃음병자, '바리새인의 누룩' 등이었으며 이들은 물질적이고 음탕하며 방탕하고 돈만 알고 부패한 성격의 소유자로 규정되었다. 나라마다 또 상황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비난은 거의 모든 기독교 국가에서 수세기에 걸쳐 유포되었다.



    서구에서 반유대사상의 뿌리는 매우 오래되었다. 듀링의 <<인종, 도덕 및 문화 문제로서의 유대인 문제>>에서 그는 "유대인과 같은 열등한 민족은 아무리 바로잡으려 해도 그 사악한 본능을 바꾸지 못한다. 따라서 유대인이 그리소도교 신자 속에 끼어들면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피해만 받을뿐이다. 유대인은 창조 능력이 없으며 그저 다른민족을 좀먹어가는 기생충일뿐이다. 따라서 근대의 민족들이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유대인의 힘을 전멸시켜야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유대사상은 특히 독일에서 오래전부터 뿌리 깊게 박혀있었다.



    유대인들은 추상적인 지적능력, 상업적 이기주의, 그리고 타락한 정신을 갖기 때문에 게르만족 여성에게는 이들이 특히 위험한 존재로 여겨졌다. 슈트라이히는 나치의 반유대주의 간행물 가운데 가장 선정적인 잡지 에서 '위험한 유대인'이 아마도 지니고 있을 성병리학에 대해 자세히 거론했다.



    그는 매번 유대인들이 독일 여성들을 강간하고 매춘을 부추긴다고 비난했다. 그는 유대인들이 제물로 사용하기 위해 독일 어린이를 유괴하여 죽인다고 주장함으로써, 중세에 있었던 유대인 혈통에 대한 뜬소문을 끄집어 내기도했다.



    더 나아가 그는 유대인들이 성적 접촉을 통해 의되적으로 독일 여성들의 피에독을 퍼뜨리려 한다고도 말했다. 또한 딘터는 독일 여성이 한번이라도 유대인과 성관계를 가졌을 경우에는 독일남자와의 사이에서 생긴 자식에게까지도 유대인의 유전자가 전수될 것이라는 주장을 아주 진지하게 펼쳤다.



    유대인은 문학, 철학, 상업, 전문 직종, 그리고 심지어 정부내에서까지 두각을 나타냈다. 유대인과 '개종한 기독교의'의 번영과 다른 경쟁자들의 시기심이 커졌고, 또 이단의 씨앗을 두려워하던 가톨릭 교단의 적대감은 고조되었다.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를 추방하려는 결정은 유럽인들은 유대인이 소유하고 있던 상당한 재산을 빼앗을수 있을것이라는 기대 심리또한 그 지배자에게나 민중들에게는 모두 결정적으로 중요한 자극제였다.



    2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전의 세계적 분위기와 흐름



    겉으로는 현란하고 요란했던 1936년 베를린올림픽으로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자, 매우 악랄했던 정책이 완화되었고 매우 노골적이었던 반유대주의 테러도 중단되면서 독일 유대인의 희망과 환상은 약간 더 연장되었다. 심지어 나치들은 국제적 비난을 진정시키기 위해 몇몇 유대인선수들의 올림픽 경기참여를 허용하기까지했다. 독일인들은 해외에서 새 독일 제국이 준법을 준수하고 평화를 애호하는 국가로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교육받았다.



    일련의 반유대주의 법률, 재산 몰수,그리고 전반적인 정권 탄압등으로, 당연하게도 유대인들이 나치독엘에서 떠나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이는 민주국가들에게 경고가 되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주도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당한 유대인 난민들의 비참한 상황을 대처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목을 내세운 국제회의가 1938년 7월 에비앙에서 열렸다.



    그렇지만 이 회의 실무자들은 이것이 모든 나라에서 피난 온 정치 난민들을 다루는 회의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런던에서 발행되는 는 몇몇 대표단이 이 당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아주 잘 요약해주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상공장관은 자국은 유대인 난민에게 아무것도 해줄수없다고 밝혔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단지 영국 이민자들만을 원하며, '다른 인종이 대규모로 이민할수 있는 길을 열어둠'으로써 '인종 문제'까지 유입되는 것은 결코 바라지 않는다고 밝혔다.



    유대인의 이주가 아주 적었던 나라인 캐나다의 대표는 경제의 불확실성과 실업의 문제를 환기시켰다. 아르헨티나는 주로 '경험이 많은 농업 경영자'를 찾는다고 하여, 대다수 유대인을 배제시키려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벨기에는 "어떤 결과에 이르기 될지 예측할 수 없는" 국제적 책무를 지고 싶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과 영국조차 유대인의 난민의 상당수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



    영국 외무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의제에서 제외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나치 정부에 대한 비난도 원천적으로 삼갔다.


    영국대표단은 동아프리카 식민지에 약간의 난민이라도 정착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검토해보겠다고 애매하게 약속했지만, 결국 재원 부족을 이유로 내세워 유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했다.


    실제로 나치 지도부가 에비앙회의에서 얻은 것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정책을 점차 더 가혹하게 실행해도 된다는 확신이었다.



    3 히틀러 개인적 이유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오스트리아에서 화가의 꿈을 키우고 살았다.


    그리고 미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원서를 내나 탈락을 하게된다. 허나 그때 히틀러의 원서를 탈락시킨 자가 유대인 교수였고, 이것으로 유대인에 대한 원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후 여러 군데를 다니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 유대인이 남의나라에서 이만큼의 권력을 잡고 있다는건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등을 몰락시킬려는게 아닌가 라는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


    또한 히틀러의 젊은 시절에 유대인 창녀와 성관계를 가졌었는데 그때 걸린 성명이 한 원인이였다.



    '박해자와의 동일시' 기제가 일어날 때 새로운 성격이 점차 예전 성격을 극복하는 갈등 과정을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일시는 의식의 영역 밖에서 일어나므로, 갑자기 새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는 통합이나 동화의 과정이 없다. 이전의 성격은 자동적으로 억압되고, 그 특성은 외부의 대상으로 투사되어 새로운 성격과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된다.



    히틀러의 경우 그가 원치 않는 특성은 모든 유대인에게 투사되었다. 히틀러에게 유대인은 악의 화신이고 세계의 모든 곤경의 원인이었다. 이는 마치 히틀러가 가진 이전의 여성성이 한 개인인 그의 모든 곤경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것과 같다.


    이러한 투사가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은 그가 빈에 있을 때 유대인의 섹스, 질병, 도착증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원치 않는 특성들을 또다시 덧붙여 이전의 자신을 증오했던 것과 같은 정도로 유대인들을 증오하고 경멸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혼자일 때는 자신의 투사를 합리화할수 없었고,혼자서 유대인들과 싸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의도에 걸맞는 대집단을 필요로 했다. 패전 독일 전체가 그것이다. 전쟁이 끝날즈음 독일은 변화되기 전의 자신과 거의 일치하는 상황이었고, 앞으로 퍼부어질 공겨고가 모욕에 노출된 약한 상태였다. 또한 독일은 정복자의 오물을 먹도록 되어있었다.



    인플레이션 시기에는 혼란스럽고 수동적이고 무기력했다. 독일은 이전의 자신을 훌륭히 상징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다시 자신의 개인적 문제를 국가적이고 인종적인 차원으로 옮겨 그것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다루었다. 하느님은 밤사이에 그를 변화시키는 충격을 주었다.



    이제 자신의 인애적이고 도착증적인 적응이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는 이제 정치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많은 저술가들은 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그 커다란 선전 가치때문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물론 반유대주의는 그의 선전도구들중 가장 강력한 무기였고, 히틀러 역시 그걸 잘 알고있었다. 그가 유대인들이 독일을 부유하게 만들것이라고 언급한 것도 여러번있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우리의 제보자들은 그것은 모두 피상적인 것이고 오히려 그는 밑바탕으로부터 정말로 유대인에 대해, 그리고 유대주의적인 모든 것에 대해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것은 우리가 세운 가설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그는 필요할 때 마다 종종 반유대주의를 선전용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피상적인 동기 밑바탕에는 분명 무의식적인, 훨씬 깊은 뭔가가 있을 것이다. 히틀러가 위대하고 강하다는 느낌을 얻기 위해 이전의 자신을 없애야만 했듯이 독일은 새로운 영광을 성취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전멸시켜야 했다. 둘다 각각의 신체를 천천히 파괴하고 죽음을 가져오는 독약들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창조적이던 민족의 혈통이 더럽혀져 멸종되었기 때문에 위대한 지난날의 문화가 모두 소멸되었다. 단지 혈액의 순수성 상실로 영원한 내적 행복이 파괴된다. 그것은 사람을 영구적으로 타락시키고, 그결과는 결코 신체와 정신으로부터 제거될 수 없다.>


    이 인용문이 상징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그의 말과 글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사고와 정서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유대인으로 상징되는 자신의 개인적 독소인 유약함과 도착 성향들을 제거하는데 성공하면 개인적 영원성을 성취할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느끼는것 같다.



    정치적 자서전이기도 한 <<나의 투쟁>>에서 볼 수 있듯이 히틀러는 게오르그 폰 쇠네러, 카를 뤼거, 그리고 바그너에게 유대주의관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나의 투쟁>>에는 유대인은 결코 창조적인 예술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음악과 건축에서는 특히 그렇다-고 주장하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은 그가 유대인들의 '기생충 같은' 문화적 활동을 특별히 악의적인 어투로 서술한 것인데, 어쩌면 바그너의 저작들에서 표절 된 것을 수도 있다.



    그가 유대인들을 다루는 것을 보면 '박해자와의 동일시' 기제가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환상 속에서 승리자가 자신에게 가할 수도 있다고 두려워했던 것을 실제로 유대인들에게 실행했다. 이를 통해 그는 다양한 만족을 얻는다.



    첫째, 그가 되고 싶어 하는 무정한 짐승으로 세계 앞에 나타날 수 있다.


    둘째, 그가 원하는대로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


    셋째, 유대인들을 제거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독일의 모든 고난의 원인인 독소를 제거하는 것으로 느낄 수 있다.


    넷째, 진정한 피학 성애자로서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들속에서 자신을 볼 수 있고, 그를 통해 대리 만족을 얻는다.


    다섯째, 유대인들을 희생양으로 사용하여 세계에 대한 그의 쓰디쓴 증오와 경멸을 발산할수있다. 여섯째, 묵직한 물질적,선진적 배당금을 받을 수 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쉽게 답변 드리면 유태인의 돈이 욕심나서 그렇다고 합니다 .

    유태인은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많이 모았습니다.

    나라없이 떠돌아 다니는 민족이라 쉽게 보았습니다.

    히틀러가 1차 세계대전에 패하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산더미 같은 빚을 지게 되는데요, 군국주의적인성격을 지닌 나치당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독일인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민족주의를 이용해 독일 민족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민족주의의 희생양이 바로 유태인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