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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11.13

소현세자의 아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합니다.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의 이름은 무엇이었나요?

소현세자가 죽고나서 동생인 봉림대군이 왕위를 이었는데요.

그럼 소현세자의 아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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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와 세자빈 봉림대군부부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습니다. 인조의 삼전도 굴욕이 있었기에 세자가 반청운동의 선봉에 서리라고 생각한 인조와 신하들의 바램과는 달리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간 후로 친청의 모습을 보인데 대해 불만이 잠재해 있었습니다. 반면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간 이후 청나라가 생각보다 훨씬 강대국이라는 사실과 선교사로 온 아담 샬을 통해 또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고 조선이 더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실천학ㆍ자 어러모로 노력을 합니다. 세자빈 강씨 또한 청 황제에게 불하받은 땅에 농사를 지어 청나라에 끌려온 백성들을 구휼하게 됩니다. 조선ㅇㆍ의 인조는 청 황실과 친해보이는 소현세자가 자신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할 것으로 의심하면서 아들에 대해 적개심을 품었고 귀인 조소용의 모함으로 세자빈 강씨 또한 미움을 받게 됩니다. 9년여의 볼모생활을 마치고 조선에 온 세자는 시름시름 앓다가 병사하고 세자빈 강씨는 모함으로 폐서인으로 출궁당하여 사사당하였으며 그들의 3아들 모두 제주도로 귀양을 보냈습니다. 첫째 석철(경선군)은 장독으로 죽었고 둘째 석린(경완군)은 병사했으며 셋째 석견(경안군)만이 살아 효종 때 귀양에서 벗어났습니다. 인조는 왕위를 둘째아들 봉림대군에게 물려주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현세자는 민회빈 강씨와 결혼하여 3남3녀를 두었습니다. 큰 아들은 경선군 이석철이었습니다.

    인조는 1647년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12, 8, 4세)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고, 그 이듬해에 큰아들과 둘째는 죽었습니다.

    세째 이석견은 효종때 1656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1665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현 세자와 세자빈 강씨 에게는 4남이 있었는데 4남은 태어 나자 마자 죽고 3남은 제주도에 귀향을 가서 2명은 죽고 3남인 경안군만 성인이 될 때 까지 살아 남았다고 합니다. 소현 세자가 죽고 나서 세자빈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약을 먹고 죽었으니 거의 온 가족이 몰살을 당한 것이나 마찬 가지 입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 입니다.

    ✅️ 원손의 이름은 이석철(경선군)이었으며, 장성하지 못하고 사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아들이었던 석린(경완군) 역시 요절하였으며 그나마 세 번째 아들이었던 석견(경안군)만 장성할 때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즉, 대부분이 비운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현세자와 강빈은 3남 5녀를 두었으며 소현세자 사후 유산한 넷째 아들까지 포함하면 4남 5녀 입니다.

    경선군 이석철/이백은 제주도 유배후 돌림병으로 사망, 소현세자의 장남이므로 경안군의 아들과 손자가 사후 양자 제도를 통해 그의 대를 이었습니다.

    경완군 이석린은 제주도 유해 후 돌림병으로 사망 , 사후 양자는 성종의 13남 영산군의 7대 손인 이의저로 지명되었습니다.

    경안군 이석견/이회: 제주도-강화도-교동도로 유배지를 옮겨다니다 결국 방면 , 혼인 후 슬하에 2남을 두었으며 혼인한지 6년 뒤 23세에 요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