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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발발이142
로맨틱한발발이14224.03.13

조선시대에도 일식을 예측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조선시대에도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었고, 지금의 기술로도 거의 정확한 연구결과들도 있었다잖아요.

그런데 일식 역시도 예측을 했었다라는 말이 있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어떤 방식으로 일식을 예측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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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일식 예측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실제로 기록에 남아있는 일식 예측 사례도 많습니다.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완벽하게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정확한 수준이었다고 평가됩니다. 일식 예측은 국가적인 중요사였으며, 왕의 권위와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일식을 예측했습니다. 당시의 천문학자들은 태양, 달, 별, 행성 등 다양한 천체의 운행을 연구하고, 이를 토대로 절기나 희귀한 현상을 예측하였으며, 천체의 궤도를 추적하여 태양의 위치, 월식과 일식의 시간을 예측하는 등 현대적인 천문학적 이론을 선행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천문학은 당대 최고 수준의 학문으로 인정받았고, 동양 천문학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종 4년 즉 1422년 1월 1일에 기록에 일식이 있으므로 임금이 소복을 입고 인정 전에 월대 위에 나아가 일식을 구하였다 시신이 시위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백관들도 또한 소복을 입고 조방에 모여서 일식을 구하니 해가 다시 빛이났다 임금이 섬돌로 내려와서 해를 향하여네 번 절하였다 추보하면서 1각을 앞당긴 이유로 술자 이천봉에게 권장을 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식을 예측하고 구식례를 치르는데 1각 그러니까 15분 정도의 오차가 난 겁니다 그러자 해당 관청에 담당자인 이천봉에게 죄를 물어 곤장을 쳤지요 사실 이천봉으로 볼 때는 조금 억울한 면이 있는데 먼저 일식에 대한 예측이 틀리는 경우가 이때만이 아니었습니다 세종 때만 하더라도 일식에 대한 기록은 모두 22회인데 실제 측정할 수 있는 일식은 12번이었습니다 그 중 한 번은 기록의 문제로 보이는데 그렇지 않더라도 9번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식을 예측했던 것입니다 당시 이처럼 일식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는 "왕권이 하늘의 뜻으로 결정된다"는 생각, 또한 하늘의 천문 현상이 지상에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종은 조선의 실정에 맞는 정확한 달력을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우선 정초 등의 학자들에게 명령하여 수시력을 연구하게 합니다. 정확한 달력을 만들려면 먼저 역법의 원리를 이해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명나라는 조선에게 매년 역서를 주기는 하지만, 역서의 제작 원리인 역법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선의 입장에서는 정확한 역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역법의 원리를 스스로 깨우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10년 가까운 연구에도 불구하고 세종 14년 7월 1일에 또 다시 일식예보에 실패하게 되자, 정인지, 정흠지, 정초 등은 명나라의 <대통통궤>, <태양통궤>, <태음통괘> 등의 역법 서적들을 구해서 수시력의 원리와 방법을 더욱 깊게 연구합니다. 그 연구 성과물이 쌓여서 결국 세종 26년(1444년)에 <칠정산내편>이 출간될 수 있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농사, 여행, 전쟁 등등 인간의 모든 활동에는 날씨가 연관되기 때문에

    몇천년전 문명이 시작될 때 부터 하늘 관측은 중요한 일거리 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천문학이 발전 했고

    문자가 발명되면서 몇백년 단위 기록도 가능해 졌기 때문에

    일식같은 독특한 현상에 관해선 기록이 자주 되어서

    여러 이론들과 쌓인 기록들을 통해 일식의 주기를 예측 할 수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왕조실록과 증보문헌비고 등에 일식에 대한 기록이 다양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조선시대는 총 261회의 일식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일식 예측이 틀릴 경우는 그 책임을 물어 관련 관처의 담당자에게 처벌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조선 조정이 참고한 대명률에 '무릇 서운관 관리가 점을 잘 못쳐서 임금에게 아뢴 경우에 곤장 60대를 맞았다.'라난 조항이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통해 조선시대 천문학과 역법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천문 관측 기법은 매우 발달하여 칠정산 내외편은 한양을 기준으로 만든 역법이고, 혼천의, 간의, 자격루, 앙붕리구 등의 천문 기구가 사용되어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측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