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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WKWHWEKGUS
DUWKWHWEKGUS23.11.08

범죄를 저질러도 잡아갈 수 없는 소도는 정말 있었나요?

그 한반도 역사중에

범죄를 저질러도 포졸이나 관원들이 쳐들어가서 범인을 잡을 수 없는 소도라는 곳이 있었다는데요

정말 있었는지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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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3세기 무렵 삼한에서는 매년 한 두 번씩 한 동네마다 제사장인 천군을 선발해 제사를 올릴 장소를 선정했는데, 이 장소가 바로 ‘소도’입니다. 소도는 성역이었기 때문에 당시 공권력의 힘이 미치지 못해 범죄자들이 도피하기 좋았으며, 이로 인해 도적질이 성행하는 병폐도 있었습니다. 또한, 한반도의 사회 구조가 고조선의 제정일치 사회에서 제정분리 사회로 넘어갔다는 증거로 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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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한시대에 존재했다고 하는 ‘소도(蘇塗)’는 범죄자가 들어가도 잡을 수 없는 곳이라는 의미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료상의 근거가 없어 정확한 사실로 보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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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도는 삼한 시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성지 입니다.

    제단을 만들고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를 세워 산천에 제사를 올렸고, 삼한 사회에서는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 매년 1~2차에 걸쳐 각 읍별로 소도에서 천군을 선발해 제사를 지냈으며 질병과 재앙이 없길 바랬습니다. 이 소도는 매우 신성한 곳으로 제사에 참석하는 자는 죄인이라도 처벌하지 않았으며 큰 소나무를 세우고 신악기의 구실을 하는 방울과 북을 달아 강신에 대한 안내 또는 신역의 표지로 삼았습니다.

    무속신앙의 솟대도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삼국시대 당시 백제가 해당 문화를 계승했다고 기록되어있으며 이는 최치원이 893년 작성한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비문에 의한 것으로 최치원은 백제의 소도 풍습이 마치 중국 전한의 한무제가 흉노로부터 노획해 온 제사용 금인을 감천궁에 봉안해 제사지냈던 일과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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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도 (蘇塗)는 삼한시대의 풍습 입니다. 중국 사서인 <후한서> 및 <삼국지> 등에는 ​소도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에서는 매년 천군을 뽑아서 소도를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고 질병과 재앙이 없기를 빌었고 죄인이 이곳으로 도망 가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하게 여겨 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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