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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호저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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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육군과 수군을 따로 뽑았나요?

현대에는 육해공군을 따로 뽑고 있습니다. 그만큼 각 군마다 전술이나 무기 등 차이점이 굉장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도 수군이라는 명칭이 따로 있었는데 따로 뽑았는지 통합으로 뽑았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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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재건된 수군은 연해(沿海)의 각 포(浦)에 복무하던 병종으로, 기선군(騎船軍) 또는 선군(船軍)으로도 불리었습니다. 세종 때에 수군은 군액(軍額)·병선(兵船)·각포설진(各浦設鎭) 등의 규모와 편제로 보아 일단 제도상으로 정비되었습니다.


      해군인 수군은 육군인 정병(正兵)과 더불어 양인층(良人層)의 주된 의무병종이었습니다. 1475년(성종 6)의 통계에 의하면, 총군병 14만 8849명 중 수군이 4만 8800명, 정병이 7만 2109명이었습니다.


      수군은 연해민(沿海民)만 아니라 산군인(山郡人)도 충원되었습니다. 수군 중에 진무(鎭撫)·지인(知印)·영사(令史)·사관(射官)·영선두목(領船頭目) 등은 격군(格軍)보다 우대를 받았습니다.


      수군의 번차(番次)는 ‘2번 1삭상체(二番一朔相遞)’로서 1개월 교대로 1년에 6개월 복무이며, 정병은 ‘8번 2삭상체(八番二朔相遞)’로서 1년에 3개월 복무로 규정되었습니다. 따라서 수군의 역은 정병에 비해 제도상으로도 배나 무거운 부담이었습니다.


      당초 수군은 호수(戶首)와 봉족(奉足)이 서로 바꾸어 입번(立番)할 수 있었으나 규제가 강화되어 호수만 입번하게 되었고, 대립방지책(代立防止策)으로 칠원목패(漆圓木牌)를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수군은 입번할 때 군량을 짊어지고 부방(赴防)해 선상(船上)에서 근무하며, 둔전(屯田)·어염(漁鹽)·해산채취(海産採取)·병선수리(兵船修理)·조운(漕運)·축성(築城) 등의 잡역(雜役)에 동원되었습니다.


      이 외에 요역(徭役)과 공물(貢物)·진상(進上)의 비납(備納)까지도 부담하였습니다. 성종 때부터 대립(代立)과 방군수포(放軍收布)가 일반화되면서 수군의 무거운 역은 대립가(代立價)의 과중한 부담으로 변모되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수군의 역이 과중하므로, 수군에게 수직(受職, 주로 影職)을 후히 하고, 복호(復戶)의 혜택을 주며, 부자완취(父子完聚)도 배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이 무거운 수군을 꺼려 양인 중 세력 없는 자만 수군에 충원되더니, 성종 때에 수군의 세전(世傳)이 규제되고 천역(賤役)으로 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칠반천역(七般賤役)의 하나로 간주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수군이 부족했으므로 숙종 때에 수군의 강화를 위해 수군속오법(水軍束伍法)을 실시하였습니다. 수군속오법은 양인·천인을 혼성해 종래 좌우령(左右領)이 서로 바꾸어 입번한 2교대에서 3영(領)으로 나누어 3교대함으로써 복무기한을 완화한 것입니다.


      수군의 편제는 조선 초에 각 포진(浦鎭)마다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수군도첨절제사(水軍都僉節制使)·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 등을 두었습니다. 세종 때 수군도절제사가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安撫處置使)가 되었으며, 휘하에 도만호(都萬戶)·만호(萬戶)가 있었습니다.


      ≪경국대전≫에는 진관체제(鎭管體制)에 따라 주진(主鎭)에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거진(巨鎭)에는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제진(諸鎭)에는 만호가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원래 수군은 해상근무가 원칙이었으나 병선 관리와 고달픈 훈련 때문에 성종 때부터 진에 성보(城堡)가 설치되었습니다. 이것은 수군의 해상근무 원칙이 무너지고 육상근무로 바뀌게 되면서, 수군과 정병과의 구분이 모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중종 때에는 방왜육전론(防倭陸戰論)이 주장되었으니 곧 왜는 수전을 잘하며 조선은 기병(騎兵)이 잘 싸우기 때문에 장기(長技)인 육군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방왜육전론의 대두로 수군이 허실화되자 왜구의 침입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에 삼포왜란(三浦倭亂) 후 경상도 수군에게만 실시되었던 연합방위체제가 전라도로 확대되더니 마침내 수군·육군이 모두 제승방략(制勝方略)으로 방위체제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수순과 육군은 별도로 뽑았다고 합니다. 수군은 각도에 수군을 지휘하는 수군 절도사를 두었고 중요 거점에는 만호가 통솔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경국대전》에 따른 수군의 정원은 총 48,800명 이었고 1년에 6개월을 복무하는 2번 1삭상체도 법제로 규정되었다고 합니다. 타군에 비해 가혹한 군역 때문에 수군은 늘 기피 대상이었고 결국 수군역은 세습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당시 육군이던 정병(正兵)은 8번 2삭상체(八番二朔相遞)로 운영되어 8개의 번이 2교대로 복무하여 1년에 약 3개월을 복무하면 되었던 것에 반해 수군은 2번 1삭상체(二番一朔相遞)로 운영되어 2개 번이 교대로 복무하여 1년 중 복무 기간이 6개월이었기 때문에 무척 고된 군역이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