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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큰고니27
밝은큰고니2723.12.13

사자놀이가 최초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언제인가요?

우리나라 민속춤 중에는 북청사자놀이와 같은 사자놀이가 있는데요. 이러한 사자놀이가 최초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언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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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1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자놀이에 대한 첫 기록은 삼국사기 권32 악지 중에서 최치원이 지은 향악잡영에서 발견됩니다. 이 한시에서는 금환, 월전, 대면, 속독, 산예의 다섯 가지 놀이를 읊고 있는데, 이 중 산예가 바로 사자놀이라고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자놀이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가 궁금하군요.

    사자놀이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모른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이사부가 우산국(지금의 울릉도)을 칠 때 전선에 나무사자를 싣고 가서, 사자로 가장하여 위협한 끝에 항복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고(권제4 「지증마립간」), 같은 책에 가야의 우륵이 지은 12곡 가운데 사자기가 있다고 적혔있습니다(『삼국사기』 권제32 「악지」). 이 곡은 사자놀이를 위한 음악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자놀이에 대한 첫 기록은 <삼국사기> 권32 '악지' 중 최치원이 지은 "향악잡영"에서 발견됩니다. 이 한시에서는 금환, 월전, 대면, 속독, 산예의 다섯 가지 놀이를 읊고 있는데, 이 중 산예가 큰 가면을 쓰고 추는 사자 놀이입니다.

    멀고 먼 사막을 건너 만 리 길을 오느라고 / 털옷은 다 찢어지고 먼지를 뒤집어썼네. / 머리를 흔들고 꼬리를 치며 인덕을 길들이니 / 뛰어난 그 재주가 어찌 온갖 짐승과 같으랴.

    사자놀이가 '먼 사막을 건너'라는 말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비 사막(서역) 계통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실학자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서는 사자놀음의 기원이 신라의 장군 이사부가 울릉도의 우산국을 정복할 때 사용한 나무 사자라고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자놀이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모른다. 『삼국사기』에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 지금의 울릉도)을 칠 때 전선(戰船)에 나무사자(木偶獅子)를 싣고 가서, 사자로 가장하여 위협한 끝에 항복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고(권제4 「지증마립간」), 같은 책에 가야의 우륵(于勒)이 지은 12곡 가운데 사자기(獅子伎)가 있다고 적혔다(『삼국사기』 권제32 「악지」). 이 곡은 사자놀이를 위한 음악일 것이다.

    신라 최치원(崔致遠, 857~?)이 읊조린 『향악잡영(鄕樂雜詠)』 가운데 산예(狻猊)는 사자놀이이다(『삼국사기』 권32 「악지」).

    사막 건너 만리 길 오느라
    털가죽 다 해지고 먼지 뿌옇게 쌓였구나.
    머리 흔들고 꼬리 치며 어진 덕에 길들었지만
    용맹스런 기개야 어찌 뭇 짐승에 비기랴?

    사자놀이가 먼 서역에서 들어왔다는 내용이다. 이두현도 “구자국(龜玆國)에서 중국에 들어온 서량기(西凉伎) 계통”이라 하였고, 김학주도 “백거이(白居易)의 시를 들어 서량기(西凉伎)의 사자놀이와 같다.”고 적었다.

    당무회의 신라박은 『당무회(唐舞繪)』에 실린 신라사자(新羅猊)탈 모습이다. 이에 대한 전기봉(傳起鳳)과 전등룡(傳騰龍)의 설명이다.

    …(전략) 신라예는 조선반도의 사자춤이다. 사자는 한 사람이 들어가 꾸몄으며 두 손과 발에 각각 사자 머리를 붙였다. 『악부잡록』의 9사자도 이 계통으로 …(중략)… 현대 일본의 경사자(鏡獅子)가 이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중국잡기사(中國雜技史)』).

    두 사람은 두 손과 발의 사자만 들었으나, 꼬리에도 또 하나의 사자 머리가 달린 점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사자는 모두 여섯이다. 지금까지 신라 사자탈에 관한 자료가 아무 것도 없었던 터에 이 그림이 나와 이만저만 반가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당무회』의 저자는 당시 이 탈을 직접 보았거나 믿을만한 근거를 바탕으로 그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림 옆에 적은 ‘신라 박(新羅狛)’은 ‘신라예(新羅猊)’의 잘못으로 보인다. 예(猊)라야 사자에 걸맞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지 『중국잡기사』의 일본말 번역판에는 이 부분이 빠졌으며 그림 또한 보이지 않는다.

    국내 학자로서는 전경욱이 처음으로 앞 그림을 소개하면서 “일본에 전하는 『신서고악도(信西古樂圖)』에 신라박이라는 동물 가면을 착용한 가면희도 그려져 있는데, 이는 사자춤의 일종으로 보인다.”고 적었다. 『신서고악도』는 12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화가(등원도헌(原道憲), ?~1159)는 『당무회』의 것을 본 떠 그렸을 것이다. 한편 『신서고악도』의 신라박 옆에 적은 해제 또한 『문헌통고』의 사자춤 내용이므로, 앞에서 든 대로, ‘이리박(狛)’이 아니라 ‘사자 예 (猊)’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자놀음은 고려로 이어졌다. 이색(李穡, 1328~1396)이 『구나행(驅儺行)』에 “오방귀(五方鬼) 춤추고 사자도 날뛴다[무오방귀용백택(舞五方鬼踊白澤)].”고 읊은 것이 그것이다.

    조선시대 기록도 적지 않다. 성종 때(1488)의 중국 사신 동월(董越)은 『조선부(朝鮮賦)』에 “춤꾼들이 말가죽을 뒤집어쓰고 사자와 코끼리로 꾸몄다식사상진몽해박지마피(飾獅像盡蒙解剝之馬皮).”고 적었다. 19세기 말의 유득공도 이렇게 썼다.

    나례도감(儺禮都監)에 딸린 연극에 산놀음(山戱)과 들놀음(野戱) 두 종류가 있다. 다락에 포장을 치고 노는 산놀음에 사자 · 범 · 만석중 등이 춤을 추며, 들놀음에는 당녀(唐女)와 소매(小梅)가 등장한다(『경도잡지』).

    송만재(宋晩載)는 『관우희(觀優戱)』에 줄타기 · 불토하기와 함께 사자놀이를 읊조렸다(1843). 또 앞에서 든 『화성성역의궤』와 김홍도(金弘道, 1745~?)의 「평안감사 환영도」에 등장한 사자는 오방색(五方色) 곧, 청 · 홍 · 백 · 흑 · 황색이다.

    이은수는 사자놀이가 대체로 탈춤의 한 부분임에도 북청 사자놀이는 이름 그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또 오색(五色) 사자인 점에서 우리 사자놀이의 원형이라고 하였다. 최치원의 산예나 백제의 미마지가 일본에 전한 것도 오색사자 놀이이며, 이들의 원류는 중국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오색 사자의 ‘오색’은 다섯 마리의 사자일 가능성이 높다. 『당서(唐書)』에 “사자 다섯 마리를 각각 그 방향의 색깔로 꾸몄다.”고 적혔고(권38 「악지 입부기」), 당의 단안절도 『악부잡록』에 “각각 다섯 가지 색깔의 옷을 입었다.”고 한 것이다. 이밖에 두우(杜佑, 735~812)의 『통전(通典)』이나(권146), 『구당서(舊唐書)』의 사자도 다섯 마리로 보이며, 산악(散樂)의 잡희(雜戱)에는 아홉 마리(九頭獅子)도 등장한다. 따라서 본디 다섯이던 것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한 두 마리로 줄면서 오색으로 꾸민 듯 하다.

    우리 사자놀이는 고구려를 통해 들어온 오방사자놀이, 이와 같은 계통의 가야의 사자기(獅子伎), 백제 기악의 오방사자놀이, 서량기의 영향을 받은 산예 등이 어우러져 성립되었다.

    중국 사자놀이에는 서하사자(西凉伎)와 오방사자(五方獅子) 두 계통이 있다. 사자춤과 두 어린이의 대화로 이루어진 서량기는 한 무제(서기전 140~87) 때 서역에서 들어왔다. 또 대월지국(大月氏國)에서 후한 장제(章帝, 75~88)에게 보낸 사자를 길들이려고, 궁인이 사자 가죽을 뒤집어 썼으며, 백성들도 이를 따라 사자처럼 꾸미고 춤을 추었다는 기록도 있다.

    북위(北魏, 386~534) 때는 사자놀이를 궁중뿐 아니라, 절이나 사당 놀이[백희(百戱)]의 하나로 손꼽았다. 양현지(楊衒之)의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내용이다.

    건중사(建中寺)에서 4월 4일 석가모니 불상을 밖으로 내올 때, 부정을 물리치는 사자가 춤을 추며 인도한다. 한 쪽에서 칼 물기(呑刀)와 불 토하기(吐火) 따위의 재주를 요란하게 펼치고, 채당(彩幢) 줄타기(上索) 같은 특이하고 괴상한 재간도 베풀었다(권1 「건중사」).

    단안절은 사자놀이가 구자에서 들어왔다고 적었으며(『악부잡록』), 당의 백거이(白居易)도 『신악부(新樂府)』 「서량기(西凉伎)」에 이렇게 읊조렸다.

    탈 쓴 호인(胡人)과 탈 쓴 사자가 나오누나.
    나무를 깎아 머리 만들고 실 꼬아 꼬리 달았네.
    금칠한 눈에 은칠 입힌 이빨 붙이고
    털옷 털며 두 귀 흔드는 모습
    서쪽 사막 건너 만리길 온 듯 하여라.
    …(중략)…
    머리 돌려 서쪽 바라보는 사자
    한 소리 구슬피 울자 관객들 모두 슬퍼하네.
    (하략)…

    “사막 건너 만리 밖에서 온” 까닭에, “털옷과 두 귀를 흔들어 터는” 것이다. 안서도호(安西都護)는 양주(凉州)가 함락 되기 전, 장안에 사자와 함께 서역사람 둘을 딸려보냈다. 그러나 양주가 적의 손에 들어가면서 안서로 가는 길이 막히자, 둘은 사자를 벗 삼아 근심을 덜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사자에게 “너는 양주가 떨어진 것을 아느냐?” 묻자, 머리를 서쪽으로 돌려 슬피운다는 내용이다. 최치원의 ‘산예’는 이 서량기의 사자놀이이다.

    다섯 방위를 나타내는 청 · 적 · 황 · 백 · 흑색 실로 꾸민 다섯 마리가 등장하는 오방사자무(五方獅子舞)는 남북조 및 수대에 들어온 듯 하다. 사자 안에 두 사람이 들어가서 춤을 출 때, 140명이 태평악을 불렀다(『통전』 권146 「악전」6). 이백(李白)이 황제의 장수를 기원하여 지은 「상운악(上雲樂)」에도 보인다.

    늙은 오랑캐 지극한 덕에 감복하여
    동으로 와 신선의 가무 진상하네.
    오색 사자와 구채(九彩) 봉황은
    늙은 오랑캐의 개와 닭 같은 것.
    (하략)…

    『당서』의 오방사자무 내용이다.

    태평악(太平樂)을 오방사자춤이라고도 한다. …(중략)… 털가죽을 뒤집어쓴 사람이 몸을 숙였다 폈다하여, 길들여져 따르는 모습을 짓는다. 두 사람이 고삐를 잡고 털이개로 다섯 사자를 놀린다. 사자는 그 방향 색으로 표현한다. …(중략)… 사자 높이는 한 길쯤이고, 한 마리에 몰이꾼 열 둘이 붙는다. 붉은 두건, 화려한 옷차림에, 붉은 털이개를 든 그들을 사자랑(獅子郞)이라 부른다(권38 「악지」).

    오방사자춤은 궁중에서 황제를 위해서만 펼쳤다. 민간에서 놀 때는 청 · 백 · 적 · 흑사자는 허용하되, 황사자는 금하였다. 황색은 황제를 상징하는 까닭이다. 당의 왕유(王維)는 황색 사자춤을 구경한 죄로 관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대당전재(大唐傳載)』).

    중당(中唐) 이후 민간에는 일정한 줄거리를 지닌 양주사자(凉州獅子)가 퍼졌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 뒤 당이 쇠미해 가는 과정이 주 내용으로, 무대는 변경을 지키는 병사들의 진영이다. 백거이의 시에 보이는 서량기(西凉伎)가 대표적으로, 대체로 사자랑은 이렇게 읖조린다.

    오늘 이곳에 나온 사자는 고향인 양주를 떠나 중원으로 왔습니다. 나라가 튼튼하고 번영을 누린 옛적에는 양주의 부엌에서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사람들은 소박하였습니다. 뽕나무가 잘 자라고 맛있는 포도주와 휘황한 홍루(紅樓)가 즐비하였으며, 호인과 한인이 섞여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나라는 썩고 외적의 침입이 잦았으며, 결국 양주는 티베트에 떨어지고 안서길도 막혔습니다. 우리는 고향에도 못 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는 장병들을 격려하고, 변경을 지키는 애국의 정열을 서량 사자의 입을 빌려 부추기는 것이다. 서량 사자는 이후 5백 년이 지난 명대에도 농촌에 남아 있었다.

    오늘날의 사자춤은 오방사자나 서량기와 아주 다르다. 농민이 아닌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가문이나 집단이 벌이는 예능이 된 까닭이다. 불을 토하거나[화사(火獅)], 탁자 여러 개를 쌓아 올린 높은 대 위[고대사자(高臺獅子)]나, 두 다리를 각각 긴 막대기에 묶고 걸으며 춤추거나[고교사자(高蹺獅子)], 6~8미터의 대나무 장대 위에서 재간을 펼치는[고간사자(高竿獅子)] 등 써커스를 닮았다. 사자를 둘이 꾸미는 것은 태사(太獅), 하나는 소사(小獅)로, 태사 한 마리에 소사 네 마리가 등장하는 하남성의 사자놀이는 옛적의 오방사자를 연상시킨다.

    호남성에서는 사자놀이패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춤을 춘다. 몰이꾼이 춤 동작에 맞추어 축원을 읊조리면, 집주인은 그 보답으로 돈을 낸다. 춤 동작과 덕담 종류는 수십 가지에 이른다. 이것이 ‘공토미사자(拱討米獅子)’로, 토미는 ‘기쁨을 알린다(道喜).’는 말과 소리 값이 닮은 데에서 왔다.

    광동성에서도 정월 초하루날 사자패들이 각 집을 돌며 춤을 춘다. 이들이 부자집 앞에서 한판 벌이고 나면, 주인은 수 미터에 이르는 참대 장대 끝에 홍포(紅包, 명절 때 붉은 종이 봉투에 넣어주는 축하금)와 녹색 잎을 매달아 올린다. 사자패들은 다시 한 번 신명을 떤 뒤, 서너 겹으로 둘러서서 무동(人塔)을 서고 사자가 이들의 어깨 위로 올라가 입으로 손을 내밀어 홍포를 거둔다. 이것이 ‘사자채청(獅子採靑)’이다. 패들이 다시 춤으로 답례를 하면, 주인은 폭죽을 터뜨려 호응한다.

    영남(嶺南)의 정월 초이튿날 사자놀이는 이와 다르다. 오색 천으로 꾸민 사자머리와 꼬리에 한 사람씩 들어가 꾸미며, 붉은 탈을 쓰고 갈색의 짧은 옷차림에 참대가지와 버들부채를 든 『서유기(西遊記)』의 사오정(沙悟淨)을 비롯하여, 귀신탈을 쓴 여럿이 뒤 따른다. 이어 10여 명의 붉은 머리띠를 두른 소년들이 손에 창과 방패를 쥐고 징을 두드리며 합세하여 사원으로 가서 참배를 하는 것이다. 이를 사참(獅參)이라 부른다.

    사자춤은 북방계와 남방계 사이에 차이가 있다.

    광동에서는 정월에 20~40명이 한 패가 되어, 집집을 돌며 춤을 추고 덕담을 늘어놓는다. 사자 머리는 대오리로 엮은 틀에 종이를 붙여 만들고, 아름답게 채색한 털이나 갈기를 덧붙여 꾸미며, 두 사람이 들어간다. 아래턱이 움직이는 사자도 있으며, 원숭이 탈을 쓰거나 사오정을 본 뜬 탈을 쓴 사람들이 따르기도 한다. 연기가 끝난 뒤, 권법(拳法)이나 봉술(棒術)을 펼치는 점도 북방과 다르다.

    북방의 사자춤은 동작이 경쾌하고 활발하며 사자는 사실적으로 꾸민다. 서커스 못지않은 재간을 지닌 점도 특징의 하나이다. 북경에서는 수 놓은 공이 달린 작대기를 쥐고 사자춤을 추기도 한다. 수구(繡球)의 율동에 따라 두 마리의 사자가 뛰거나 웅크리거나 몸을 비틀며 뛰는 모양은 북 · 징 · 나팔 소리와 더불어 신명을 자아낸다(『북경풍속도보(北京風俗圖譜)』).

    일본의 오방 사자놀이는 7세기초 백제 미마지(味摩之)가 들여갔다. 『일본서기』 내용이다.

    귀화한 백제 사람 미마지가 오(吳)나라에서 배운 춤을 출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사꾸라이(櫻井)에 살며 소년들을 가르쳤다. 마노노이비도데시(眞野首弟子)와 이마기노하야히도사이몬(新漢濟文)이 배워서 춤을 전하였다(推古天皇, 20년[612] 5월 5일).

    이 글 가운데 오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에 대한 여러가지 설이다.

    1) 중국 삼국시대의 오이다.
    2) 서기 280년에 오가 망한 뒤, 강남지방을 이렇게 불렀다.
    3) 특정한 나라 이름이다.
    4) 오는 중국 전체를 가리킨다.

    3)의 경우, 전라남도 구례(求禮)라는 설[금정학(金廷鶴)]과 경상남도 낙동강에 있던 나라라는 설[이영식(李永植)], 전라남도 남원이라는 설[이병도(李丙燾)], 고구려를 가리킨다는 설[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 · 삼품창영(三品彰英) · 상전정소(上田正昭) · 금석형(金錫亨)]등이 있다.

    오는 고구려이다. 고구려의 고(高)는 높임말이고, ‘구려’가 나라 이름으로, 구레는 구려의 일본식 표기이다. 일본말 ‘오’의 소릿값이 ‘구레’인 까닭에 이를 고구려를 가리키는 말로 쓴 것이다. 더구나 6세기 무렵의 남중국에는 오가 아니라, 남조의 송(宋)이 있었다. 실제로 오는 222년에서 280년까지 52년간 존속하였으므로 연대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오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강남지방의 통칭이라는 설도 옳지 않다.

    구레(吳)가 고구려임을 알리는 기사는 『일본서기』에도 있다(「應神天皇」 37년[306]).

    봄 2월 무오 초하루, 치노오미(阿知使主)와 쓰가노오미(都加使主)를 구레(吳)에 보내어 재봉공(裁縫工)을 구하였다. 이들은 고마로 건너가서 구레로 갈 생각이었다. 고마에 이르렀으나 다시 갈 길을 몰라 길라잡이를 붙여달라고 청하였다. 고마 왕이 구레하(久禮波)와 구레시(久禮志)를 내주어 구레로 갈 수 있었다. 구레왕은 에히메(兄媛) · 오도히메(弟媛) · 구레하도리(吳織) · 아나하도리(穴織) 등 네 여인을 주었다.

    구레(吳)는 고구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김석형의 지적대로, 백제로 간 두 사람은 길라잡이를 따라 고구려로 들어간 것이다. 만약 이들이 중국 오에 갔다면, 두 사람이 안내 하였다는 말은 사리에 어긋난다. 또 같은 책 진토쿠(仁德)천황 58년(370) 겨울 10월의 “구레국(吳國)과 고마국(高麗國)이 함께 조공하였다.”는 기사도 사실 여부야 어떻든지, 고구려와 백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중국의 오가 어떻게 당시 일본이라는 이름조차 없었던 야마또(일본)에 조공을 바쳤겠는가?

    앞 책 유우랴쿠(雄略)천황 6년(462) 여름 4월조에도 “구례국(吳國)이 사신을 보내 물건을 바쳤다.” 하였고, 같은 천황이 두 사람[신협촌주청(身狹村主靑) · 회외민사박덕(檜隈民使博德)]을 구레국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사도 있다. 이 또한 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구레는 분명히 나라 이름이므로, 강남 통칭설은 근거를 잃을 수밖에 없다. 한편 『일본서기』를 비롯한 옛 문헌에 고구려를 ‘고마’로 적기도 하였지만, 이는 백제의 이름이 ‘구다라’로 정착된 이후의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리사와 마사르(成澤勝)가 구례를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있던 대방군(帶方郡)으로 비정한 것은 그럴 듯 하다. 『고사기』에도 “오나라 사람들이 건너 왔으며 이들을 구레하라(吳原)에 살게한 까닭에 구레하라라 이른다.”는 내용이 있다(「雄略天皇」). 따라서 이들도 중국 오나라가 아니라 고구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일본에서 오를 중국 전체로 여겼다는 주장을 편 가와타케 시게토시(河竹繁俊)는 “백제의 미마지가 전한 악무는 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는 하나 …(중략)… 독특하고 커다란 가면을 생각할 때 …(중략)… 중국이 원산지가 아니라 서역이라 불리는 중앙아시아에서 …(중략)… 중국에 전래된 것으로, 티벹 · 인도 등의 가면무도극이 아니었나 추정된다.”고 하여 모순을 보였다. 뒤의 말이 사실이라면 탈춤은 고구려에서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6세기의 긴메이(欽命)천황 때 오왕 자손이 기악(伎樂)을 가져왔다는 기록(『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이 있으나, 사자놀이는 2세기 뒤 불교와 함께 건너갔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일본서기』에 686년 신라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가와라데라(川原寺)의 기악(춤꾼 · 잽이 · 악기 · 의상)을 쓰쿠바 항구까지 옮겼다는 내용이 보인다(「天武天皇」 하 주조 원년 4월 8일). 기악이 절의 공양 의례 외에 귀빈을 위한 잔치에도 등장한 것이다. 이 기악은 신라에서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초기의 사자놀이는 절간의 법회 의식으로 자리잡았다. 『법륭사(法隆寺) 자재장(資財帳)』 등에 보이는 747년 명(銘)의 기악(伎樂) 탈 들이 그것이다. 특히 가장 오랜 것의 하나로 손꼽히는 752년 명(銘)의 정창원(正倉院) 사자는 동대사(東大寺) 대불개안(大佛開眼) 공양 때 쓴 것이다. 이 뒤 사자놀이가 민간에 퍼지면서 신사의 제례에도 나타났다.

    기악에서는 액막이 역의 치도(治道)를 선두로 사자 · 오공(吳公) · 금강(金剛) · 바라문(婆羅門) 등이 따르며, 사자는 몰이꾼(獅子兒)의 지휘에 따라 춤을 추면서 악귀를 쫓는다. 기악이나 무악같은 고대 예능의 사자는 제장(祭場)의 잡귀를 물리치는 구실을 한다.

    사자놀이는 8세기에 크게 퍼졌다. 12세기의 「신서고악도(新西古樂圖)」가 좋은 보기이다. 사자꼴 가죽을 뒤집어 쓴 한 사람은 머리에, 다른 하나는 꼬리에 들어가고, 한 몰이꾼과 두 동자(童子)가 뒤에서 징으로 신명을 돋우는 장면이다. 13세기(鎌倉時代)에도 사자놀이를 사월 파일과 7월 15일의 우란분재(盂蘭盆齋) 때 펼쳤으나, 19세기에 사라졌다.

    중세(12세기말~16세기)에 이르러 사자는 더욱 신성한 존재로 떠올랐다. 각 집의 부뚜막이나 집터를 정화하는 구실을 맡는 한편, 사자가 머리를 물면 무사태평하다는 속신도 낳았다. 또 기우제나 홍수를 막기 위한 의례에도 사자놀이를 베풀었다.

    사자놀이는 기악뿐 아니라 무악(舞樂)에도 포함되었다. 주로 절간에서 이어온 무악은 당악 · 백재악 · 고려악 · 신라악이 중심이었으며, 특히 ‘고마이누(狛犬)’가 춤을 추었다. 앞에서 든 대로, ‘고마’는 한반도 또는 고구려를 가리키며 ‘이누’는 개라는 뜻이다. 곧 ‘한국 개’이다. 우리네 제주도개와 진돗개가 일본 개의 시조가 된 사실은 널리 알려졌으며, 오늘날에도 신사나 절간 입구 양쪽에 세운 석상을 고마이누라 부른다. 그리고 이들이 잡귀를 쫓는 구실을 하는 점은 사자춤과 일치한다. 이로써 무악도 우리가 전한 증거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이 춤도 15세기 이후 점점 쇠퇴하였다.

    그러나 민간에서 세시풍속으로 굳어진 사자놀이는 1998년 9월말 현재 7,878개소에서 벌일 정도로 널리 퍼져 나갔다. 현재 전국에 분포하는 사자놀이는 대륙계의 2인 사자와, 동일본에 퍼진 1인 사자 두 종류가 있다. 2인 사자는 몸을 5색 천으로 꾸미고 앞 뒤 한 사람씩 들어가서 춤추는 반면, 1인 사자는 각기 사자탈을 머리에 뒤집어 쓴 여럿이 요고(腰鼓)를 치면서 춤춘다. 앞의 것을 기악(伎樂)사자, 뒤의 것을 풍류사자라 부른다. 이밖에 백명 이상이 들어가 추는 백족(百足)사자도 있다.

    1인 사자놀이는 간토우지방의 경우, 숫사자 · 암사자 · 중사자 셋이 등장하며, 꽃관을 쓴 소녀 또는 여장한 남자가 연주하는 음악에 따라 춤 춘다. 이로써 잡귀가 달아나고 복이 오리라 여기는 것이다. 이때 배에 달아맨 북을 스스로 치면서 춤 추고 노래를 부른다. 사자 머리 외에, 용 · 멧돼지 · 사슴 · 곰 머리로 꾸미기도 한다.

    2인 사자놀이는 사자신악(獅子神樂)이라 하여 제례나 전악(田樂)에서도 벌이며, 태신악(太神樂)과 산복신악(山伏神樂)에도 들어 있다. 태신악은 사자가 벌이는 기도와 곡예로 이루어진다. 전국에서 베푸는 악귀 쫓기나 풍년을 기원하는 2인 사자놀이는 대체로 태신악계이며, 범 머리(虎頭)를 쓰고 추는 호무(虎舞)도 있다.

    앞에서 든대로 기악 사자놀이는 7세기 초 기악의 일부로 한국에서 들어갔다. 이보다 50년 뒤에 들어온 무악(舞樂)에도 사자춤이 들어 있으며, 사자와 연관된 여러 종류의 예능을 낳았다. 기악 사자는 신이 탄 가마(御輿) 앞에서 제례의 행렬을 이끄는 한편, 음악에 맞추어 악귀도 쫓는다. 이것은 뒤에 시골 청소년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복을 빌어주는 연중행사가 되었고, 이를 생업으로 삼은 사람도 나왔다.

    한국 · 중국 · 일본의 사자놀이를 견주면 다음과 같다.

    1) 한국에서는 정월 14일과 대보름 및 단오에, 중국에서는 주로 정월 14일과 대보름에, 일본에서는 정월과 7월 15일 그리고 음력 8월 15일에 벌인다.

    2)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때, 백수의 왕인 사자의 위엄을 빌어 잡귀를 쫓는 동시에 행운을 맞으려는 세시풍속인 점은 공통적이다. 사자를 앞세우고 집집마자 찾아다니며, 무사태평과 풍년을 빌어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3) 사자춤이 중국 기악에서 무악개장(舞樂開場)에 앞서 악귀를 쫓기 위한 음악으로 선두에 서듯이, 우리 강령탈춤과 은률탈춤에서도 길놀이 선두에 서고 하회별신굿 탈놀이에서도 주지춤이 놀이 첫 대목에 등장한다.

    이와 달리,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에서는 산예가 마지막에 등장하며 영남의 오광대와 들놀음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해 이두현은 “기악의 전승과 오기의 전승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하였다.

    4) 세 나라에서는 모두 사자놀이를 일반인이 펼친다. 그러나 오로지 마을 주민이 참가하는 한국과 달리, 중국과 일본에서 전문인이 펼치기도 한다. 특히 중국에는 대를 이어 오는 가문(家門)도 있으며, 서커스를 닮은 고난도의 기예를 보인다. 일본의 전문인들은 사자를 앞세우고 전국을 돌며 잡귀를 쫓거나 돌림병을 막는 구실을 한다.

    5) 중국 사자춤은 오락적인 요소가 많아 흥행에 성공한 반면, 일본은 종교적인 성격이 짙다. 중국과 한국 절간에서는 일찍 자취를 감추었음에도, 일본 사찰 무악에서 사자놀이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까닭은 이에 있다. 한편, 우리네 봉산탈춤에도 불교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자에게 “문수보살을 태우고 다니던 네가, 석가여래의 명을 받아 노승을 파계시킨 우리를 벌주려고 왔느냐?” 하는 대목이 그것이다.

    6) 한국 사자는 한 마리가 원칙이며(북청사자놀이도 본디 한 마리였다), 일본도 한 마리가 많다. 그러나 중국은 1~9마리이다. 한편, 북청사자놀이에서 사자가 사람(기생 또는 어린이)을 잡아먹지만(오늘날에는 토끼로 대신한다), 일본이나 중국에는 없다.

    7) 일본에서 오늘날에도 8천여 개소에서 사자놀이를 즐기며, 중국에서도 대중오락의 하나로 쏜꼽힌다. 그러나 한국은 정부가 무형문화재로 지정 보존하는 덕분에 명맥이 유지되는 형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