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규의 출신과 생년의 기록은 찾기 어렵고, 1010년(현종 1)부터 그 행적이 확인됩니다.
목종때 형부낭중의 관직에 이르렀고, 강조의 혁명후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가 되어 흥화진사(興化鎭使) 호부낭중(戶部郎中) 정성, 흥화진부사(興化鎭副使) 장작주부(將作注簿) 이수화(李守和), 판관(判官) 늠희령(廩犧令) 장호(張顥)와 함께 흥화진을 사수하였습니다.
흥화진을 지키던 장수들은 거란의 항복 권유에 응하지 않았고, 성종이 은그릇, 비단옷 등을 보내며 다시 귀순을 재촉하였으나, 여전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1010년 12월 6일 거란은 곽주(郭州, 평안북도 곽산군)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6,000여 명의 군사를 주둔시켰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양규는 16일 흥화진에서 군사 700명을 이끌고 통주로 이동하여 패잔병을 1,000명을 수습하였고, 17일 밤을 타 곽주로 이동하여 그곳을 지키던 거란군을 급습하여 승리 하였으며, 남녀 7,000여 명을 구출하여 통주로 옮겼습니다.
양규는 18일 군대를 이끌고 무로대를 지키던 거란군을 습격하여 2,000여 명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3,000여 명을 되찾았습니다. 다음날인 19일 이수(梨樹)에서 거란군과 충돌하여 석령(石嶺)까지 추격하여 2,500여 명을 죽이고 포로 1,000여 명을 구출하였고, 22일 여리참(余里站)에서 거란군과 싸워 1,000여 명을 베고 포로 1,000여 명을 되찾았는데, 이 날 세 번 싸워 모두 이겼습니다. 28일 애전(艾田)에서 거란군 선봉대를 급습하여 1,000여 명을 죽였는데, 곧 성종이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오자 양규는 귀주(龜州) 별장(別將) 김숙흥과 종일 싸웠으나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져 모두 전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