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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20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역할에 대해서 궁금하고 동아시아 및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해서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어떠한 역할을 하였고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떠했는가요 그리고 임진왜란을 통해서 백성들의 삶은 어떻게 변화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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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던한굴뚝새285
    모던한굴뚝새28523.12.20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은 경상, 전라, 충청 삼도의 수군을 이끄는 삼도수군통제사였어요. ‘세계 최초의 철갑선’ 거북선을 만들어 일본군에 맞섰지요. 옥포 해전에서 일본군에게 첫 패배를 안겨 주었으며 이후 사천 해전, 한산도 대첩을 이끌며 남해 바다를 통해 북쪽으로 올라가려던 일본군의 발을 묶었지요. 원균과 몇몇 대신들의 모함으로 벼슬 없이 싸움터에 나가기도 했어요.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서는 12척의 배로 명량 해전에서 승리했어요. 그러나 1598년 물러나는 일본군과 싸우다가 노량 해전에서 전사했어요.

    백성들의 삶은 이로 말할 수 없이 비참했겠지요.

    하지만 그 이후에 백성의 삶은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1. 변화하는 조선의 농촌 사회

    외세의 침략 이후 조선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어요. 특히 농사법이 크게 바뀌어 농민들은 예전보다 두 배에 가까운 수확을 올릴 수 있었어요.

    논농사에서는 모를 한 곳에 심었다가 싹이 자라면 논에 옮겨 심는 이앙법(모내기법)이 보급되었고, 밭농사에서는 견종법(골뿌림법)을 쓰게 되었지요. 견종법은 평평한 땅에 고랑을 만들어 작물을 심는 방법으로 바람의 피해를 크게 줄여 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었어요. 또 논밭을 일구고, 거름을 내는 일을 할 때 쓰는 농기구들도 새롭게 발전시켰지요. 농사짓는 방법에서부터 사용하는 도구까지 발전을 이루자 농사일이 훨씬 쉬워졌고 수확도 두 배 이상 늘어났어요.

    덕분에 농촌에는 새로 부자가 된 농민들이 생기고, 담배나 인삼 같은 값비싼 농작물을 재배해서 큰 돈을 버는 농민들도 있었어요. 이 당시 인기 있던 작물에는 목화, 약재, 고추, 호박, 삼 등이 있었어요. 또 흉년이 들 것에 대비해 고구마나 감자를 심는 곳도 많았지요..

    하지만 한편에서는 농사지을 땅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어요. 예전에는 네 명의 소작농(小作農)이 짓던 땅을 한 사람이 지을 수 있게 되니 세 사람은 소작을 지을 땅을 구하지 못하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농사지을 땅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이곳 저곳을 떠돌며 날품팔이 생활을 하거나 물건을 만드는 공장이나 광산에서 일을 하게 되었어요

    2. 광산과 상업의 발달

    우리 나라는 삼국 시대부터 중국과 일본에 금, 은, 쇠 등을 수출했을 만큼 발달된 광산 기술을 가지고 있었어요. 조선 초기에는 이런 광산업을 나라에서 맡아했어요. 개인이 함부로 광산을 세웠다가는 엄한 벌을 받았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개인이 광물을 캐내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어요. 대신 나라에서는 정해진 만큼 세금을 받았지요.

    여러 광물들 중에서도 은을 캐내는 광산의 개발이 활기를 띠었어요. 청나라에 보내기 위해 많은 양의 은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광산의 발달과 더불어 상업도 조금씩 일어나게 되었어요. 원래 조선은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나라였어요. 그래서 대부분의 백성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스스로 만들어 쓰거나 물건끼리 맞바꾸는 게 보통이었지요. 그러나 전쟁을 치른 뒤 황폐(荒廢)해진 농촌에서 살 수 없었던 농민들이 서울로 올라와 상업에 뛰어들면서 장사는 활발해졌어요. 이들은 육의전(시전) 상인들과는 달리 아무 곳에서나 장사를 했어요. 그래서 이들을 난전 상인이라고 했지요.

    3. 무역의 발달과 화폐의 사용

    조선 시대에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계급이 있었어요. 공산품을 주로 만드는 장인들 계층은 상민에 속했어요. 이들은 신분상 농민 다음으로 꼽히면서 점차 발달해 가는 상업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어요.

    장인들은 주로 관청이나 궁중에서 사용되는 물건이나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었어요. 농기구, 동전, 무기, 놋그릇, 금속 활자, 기와, 종이, 대나무 제품 등 종류도 다양했지요. 이런 물건들 중에는 뛰어난 기술로 빚어 낸 훌륭한 예술품들도 있었어요.

    장인들이 만들어 낸 물건을 외국과 사고파는 무역도 발달했어요. 조선에서 하는 무역은 주로 중국에 조공(朝貢)으로 보내는 물건들이나 중국에서 답례(答禮)로 보내 온 물건들을 사고파는 공무역과, 개인이 나라를 넘나들며 장사를 하는 사무역이 있었어요.

    이 때 조선에서는 인삼, 은, 가죽, 소금, 종이 등을 팔고, 청나라에서는 고급 비단, 말, 약재, 문방구 등과 같은 사치품을 주로 가져왔지요.

    인조 때에는 산업의 발달에 맞추어 많은 사람들이 화폐를 사용하게 되었어요. 나라의 상평청에서 만든 금속 화폐인 ‘상평통보’는 사람들이 널리 쓰면서 숙종 때에 자리를 잡게 되었지요.

    한편, 전쟁 후 조선에는 신분상의 변화도 일어났어요. 양반은 원래 문관과 무관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었어요. 그러나 나중에는 관직이나 과거 시험의 합격 여부에 상관없이 양반의 후손들을 가리켰지요. 그러다 보니 양반의 수는 점차 늘어나게 되었어요. 중인들도 상업과 무역의 발달로 지위가 올라갔으며, 농민들 중에도 토지를 갖게 된 부자들이 생겨났어요.

    임진왜란 때 노비 문서가 많이 불탄데다가 나라에서도 많이 풀어 주어 노비의 수도 줄어들었지요. 이렇게 왜란과 호란을 겪은 조선에는 많은 변화가 일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