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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빵단팥빵
보름달빵단팥빵23.08.15

고려후기에 설치한 전민변정도감은 무엇인가요?

고려후기에 왕권이 크게 약화되고 권문세족들의 위세가 크게 상승하여 왕귄자체에 도전으로 부상하자 왕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였다는데 무엇을 하던곳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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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15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민변정도감은 고려 후기의 개혁 기관으로서,

    권문세족이 토지와 노비를 늘려 국가 기반이 크게 악화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 특별기구입니다.

    공민왕 집권 기에 승려 출신 신돈이 왕에게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할 것을 청원해 설치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려주거나 양민으로 해방시켰습니다. 이를 통하여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고 재정 수입의 기반을 확대하려고 했습니다.

    중기 이후 권신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많은 토지를 사유화했습니다. 이로써 농민은 땅을 잃고 과중한 과세에 견디지 못하여 유민이 되거나 노예로 전락하였습니다. 이에 원종 10년(1269) 처음으로 전민변정도감을 두어 이러한 모순을 타개하려 하였고, 이어 충렬왕 14년(1288)과 27년(1301), 공민왕 1년(1352), 우왕 7년(1381)에도 설치하였다. 공민왕 15년(1366)에는 왕의 신임을 받던 신돈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했으며, 신돈은 또한 스스로 판사가 되어 강력한 정책을 취하여 토지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노비를 양민으로 해방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 등을 비롯한 권문세가의 반대에 부딪혀 신돈이 실각하는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민변정도감은 공민왕만이 설치한게 아니라 고려 후기에 여러 왕들이 설치했다 폐지했다 반복합니다.



    1269년(원종 10) 최초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합니다.. 그 뒤 1288(충렬왕 14) ~ 1301(충렬왕 27), 1352년(공민왕 1), 1366년~1381년(우왕 7), 1388년(우왕 14)에도 각각 설치됩니다.



    그런데 공민왕 때가 성과가 매우 좋았기 때문에 공민왕이 보통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했다고 시험에 자주 나오죠.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은 고려 후기의 개혁 기관으로서, 권문세족이 토지와 노비를 늘려 국가 기반이 크게 악화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 특별기구 입니다. 공민왕 집권 기에 신돈이 왕에게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할 것을 청원해 설치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큰 영향력을 행사 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후기 권세가에게 점탈된 토지나 농민을 되찾기 위해 설치한 임시기관.


    1269년(원종 10)에 처음 설치했고, 이후에도 충렬왕·공민왕·우왕 대에 몇 차례씩 설치한 적이 있다. 처음 설치할 때는 실각한 권신이 불법으로 점탈한 토지·농민을 추쇄(推刷)하기 위해서였으나, 추쇄한 것을 다시 새로운 권신이 차지하는 병폐가 반복되었다. 그러나 1366년(공민왕 15) 공민왕의 개혁정치에서는 당시 혼란했던 토지와 노비제도를 과감히 정리하고자 이를 설치했다. 이때는 권세가들이 공·사전을 점탈하는 한편 양인을 노비로 삼고 역리·관노·백성 등의 사점(私占)하여 농장을 확대시키고 있었다. 그에 따라 국가의 재정기반인 토지와 유역인(有役人)이 대폭 감소되는 추세였다. 이러한 폐단을 뿌리뽑기 위해 당시 권력을 잡았던 신돈은 스스로 전민변정도감의 판사가 되어 개혁을 단행했던 것이다.


    그 활동은 과감하고 광범하게 이루어져 일반 민중이 크게 지지했고, 고려 후기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조선 초 유학자들조차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정도였다. 하지만 권문세가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쳐 신돈이 실각하면서 이 개혁작업도 중단되고 말았다.

    출처 : 한국고중세사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