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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2

양인개병제가 무엇이며 언제 실시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양인개병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양인개병제는 어느시대에 실시 되었나요?

그리고 양인개병제의 효과는 어떤것들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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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세가 넘어 성인이 된 모든 양인 장정은 60세가 될 때까지 군역을 부담했습니다. 양인 모두에게 군역이 부과되는 양인 개병 원칙이 세워진 것입니다. 농사짓는 양인들이 직접 현역 군인인 정군이 되었습니다. 농민이 교대로 군사 훈련을 받고 군복무를 하는 농병일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농민과 병사가 같다는 뜻이죠. 경우에 따라서는 군복무를 물질적으로 돕는 보인1)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군역은 자유인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는 양인인 농민의 권리이자 의무였습니다. 그러므로 노비는 군역을 질 수 없었고, 다만 필요에 따라 노비가 특수군에 편제되는 일은 있었습니다. 군사는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조직되었습니다.

    조선의 군역제도는 병농일치를 기반으로 하는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로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양인이면 누구나 군역의 의무를 졌다. 그러나 현직 관료와 학생, 향리 등은 군역을 면제 받았으며, 종친과 외척, 공신이나 고급 관료의 자제는 특수군에 편성되어 군역을 대신하였다. 농민 의무병들은 서울에서 근무하거나 국경 요충지에 배속되어 일정기간 교대로 근무하는데, 급료는 지급되지 않았지만 복무기간에 따라 품계는 받았다.

    군사조직은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누었는데, 지방군은 대부분 의무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육군과 수군으로 나뉘고 각 도마다 병영(兵營)과 수영(水營)을 두어 병사와 수사가 지휘하도록 하였다. 중앙군은 정군을 중심으로 갑사(甲士)나 특수병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특수한 조직으로 잡색군(雜色軍)도 있었는데, 서리나 신량역천인, 노비 등으로 구성되어 유사시에 대비하도록 하는 일종의 예비군이었다.

    지방군 지휘체계는 초기에는 진관체제로 운영되었고, 중기에는 제승방략체제로 운영되었다. 진관체제는 지역단위의 방위체제로 행정단위의 하나인 읍을 군사 조직 단위인 진(鎭)으로 편성해 그 크기에 따라 주진(主鎭), 거진(巨鎭), 제진(諸鎭)으로 나누고 각 읍의 수령이 군사 지휘권을 겸하는 것이었다. 진관체제의 장점은 각 행정구역이 자체적으로 군사기능을 담당하므로 지리에 밝은 이점을 이용하여 지형적 특성에 맞는 작전을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한 진관이 패퇴(敗退)하면 다른 진관이 방위의 공백을 메워서 싸우게 하는 등 연계적인 체제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소규모 지역향촌방위 개념이어서 적의 대규모 침공에는 상당히 불리하였다.

    진관체제는 병농일치를 기반으로 운영되는데, 16세기 초 부터 조선사회에서는 양반관료층의 대규모 토지집적 현상이 일어나면서 자영농이 몰락해 갔다. 자영농의 몰락은 자연스럽게 자연부락을 단위로 성립한 행정체제의 변질을 초래하여 진관체제의 몰락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진관체제가 지역의 방위체제가 되기는 어려웠다. 그리하여 조선중기부터는 제승방략체제로 대체되었다. 제승방략(制勝方略)체제는 전쟁이 발발하면 각 지방의 수령이 군사를 인솔하여 미리 할당된 방어지에 가고, 중앙으로부터 파견되는 장수나 본도의 병수사(兵水使)가 그 지휘관이 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때 동원되는 병력은 수령이 소관내의 군사, 비군사를 막론하고 모두 동원하는 것이 상례였다. 유성룡은 임진왜란의 가장 큰 실패 이유 중 하나는 제승방략제였다고 하였다. 각 읍의 수령이 소속군사를 이끌고 본진을 떠나 배정된 방어지역으로 가버리자 후방지역에는 군사가 없어 일차 방어선이 무너지면 그 뒤를 막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이를 예상하고 난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 10월 당시의 방어태세인 제승방략의 결함을 지적하고 진관체제를 복원시킬 것을 건의하였지만 제승방략이 시행된지 오래되어 갑자기 변혁할 수 없다고 보고함에 따라 중지되고 말았다. 결국 임진왜란 중에 유성룡에 의해서 진관체제의 재정비론이 거론되었고, 이후 속오군이 설치됐다.

    [출처] 양인개병(良人皆兵) - 군사제도|작성자 제이콥, [네이버 지식백과] 모든 양인은 농사도 짓고 군역도 지고 : 군역 제도와 군사 조직 (고교생이 알아야 할 한국사 스페셜, 2009. 2. 5., 김아네스, 최선혜)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22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인개병제는 조선시대에 만 16세 ~60세까지 병역의무를 지도록 법제화 한 것입니다.

    즉 천민이 아니면 무조건 다 군대에 가야한다는 것인데, 이는 예외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조선시대 특별 예우를 받아 병역제도에서 면제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양반은 시험을 공부한다는 이유로 합격때 까지 면제, 중인은 하급관리와 기술자, 지방의 향리들로 벼슬을 가진 지배층이므로 군에 복무할 시간없는 사람들이라 면제로 이 두 계층은 군역에서 면제됩니다.

    즉 양반과 중인은 면제, 천민은 천해서 군대에 가지 못하니 결국 상민들만 군대에 가게되는데 상민은 대부분 농사,수공업, 장사로 생계를 꾸리던 계층으로 그중 대부분이 농민이었습니다.

    즉 실제 군대를 가야했던 계층은 농민들 뿐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모든 군인은 군역을 부과함으로써 충당하였다.

    즉, 16세에서 60세에 이르는 모든 장정은 징발의 대상자이건, 무과에 급제하여 편입되건, 신분적인 특전에 의하여 편입되건 간에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군역의 의무를 져야 하는 국민개병제였으며, 그 주류는 역시 농민이었다.

    그러나 모든 농민이 현역으로 복무할 경우 토지 경작에 노동력 등이 부족하여 농업경제 기반이 흔들리기 때문에 장정 모두를 징발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신체가 건강하고 비교적 부유한 자는 호수(戶首) 혹은 정병이 되어 서울에 근무하거나 지방 요새지에 파견하였으며, 여기서 제외된 자는 봉족이라 하여 정병에 대한 재정적인 부담을 지도록 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이미 고려시대 군반제의 양호제에 그 연원을 두고 있었으나, 고려시대와 다른 점은 군인전을 경작하는 것이 아니라 포(布)를 바쳐 돕는다는 것이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② 양인개병제


    ㉠ 16~60세 양인 장정은 누구나 정군(징집병)․보인(=봉족, 정군의 비용부담)이 되어야 했음.


    ㉡ 왕족․공신․고관의 자제는 특수병에 편제. 현직관료․학생․상인․수공업자․어민은 면제.


    ㉢ 정군은 복무기간에 따라 품계와 녹봉 수여, 서울이나 국경 요충지에서 교대복무.

    -출처: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