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으로 조선 국민의 대일감정이 악화되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전국이 소란해지자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공사관 보호라는 명목으로 수병 백명을 서울로 데려옵니다. 이에 친러파인 이범진 등은 베베르와 공모하여 건양 1년 2월 11일 국왕의 거처를 궁궐로부터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습니다.
당시 러시아 공사관은 조선과 가까웠고, 외국인 지역으로 외부인 출입이 가능, 또한 당시 국제적인 권력의 하나로 안정을 유지하는데 있어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당시에 일본이 청일전쟁을 이김으로써 러시아와 미국은 일본을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특히 러시아가 많이 간섭을 해서 일본은 랴오둥 반도는 청나라에게 다시 주게 됐습니다. 이를 보고 우리나에도 친러파 친미파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을미사변 이후에 불안해 했던 고종에게 친일파들이 폐위를 공모하고 있으니까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을할 것을 권했고, 고종은 이를 받아 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