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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호저172
까칠한호저17223.04.06

장비는 얼마나 난폭했길래 부하에게 죽었나요?

장비는 유비와 관우의 의형제로 삼국지에서 유명하지만 그리 좋은 평가는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아는데 얼마나 난폭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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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06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일신의 용맹은 물론이고 군대의 지휘, 전술, 전략 모두 최상급인 용장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장비는 천하에 위용을 떨친 용장이었으나, 장수로서 필요한 모든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사람으로서의 포용력이 부족해 결코 덕장이 될 수 없었고 그것이 본인의 발목을 잡게 된 무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장판파에서 단기로 조조의 대군과 맞선 용맹을 과시했으며, 유비의 입촉 시절에 형주에서 출발하여 파서를 박살내며 낙성까지 고속도로를 뚫어 기동전에 능한 것을 입증했다. 한중 공방전에서 훗날 제갈량의 진격을 여러번 막아내는 명장 장합과의 장기전 이후 별동대 기습으로 군세를 말 그대로 몰살시키는 전공을 세우고 한중 방어선을 초토화시켰다. 이후에 조조가 한중을 회복하려 출병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을 정도.

    수천년의 중국사에서도 장기전에 능한 장수는 드물다. 장비의 주군이자 군사적 재능으로 조조 다음가는 군웅이었던 유비조차도 이릉에서 장기전을 벌이다 대패한 것만 봐도 장비의 군사적 재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성 공방전에서 온 천하를 진동시킨 관우와 더불어 만인지적이라는 평을 받은 유이한 장수. 연의에서 부각된 면인 무력이 뛰어난 장수의 모습에 더해 유능한 야전사령관이기도 했다는 것이다.[58]

    주인인 유비가 도망다닐 때도 이미 천하에 이름을 떨친 관우와 더불어 절대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의리, 위연이 자기를 제치고 한중 태수로 임명되었을 때도 불평하지 않는 대인의 그릇까지 겸비한 호걸이었다. 단기로는 항우, 별동대를 지휘하면 하후연, 대군을 이끌면 법정이 되는 식인데, 이게 삼국지연의가 아닌 정사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즉, 사기 캐릭터.

    다만 관우에 비해서도 검증된 정사에서의 자료는 더더욱 적은데, 확실한 것은 관우와 더불어 독보적인 당대 제일의 무장으로 칭송받았다는 정도이다. 정사 삼국지에 직접 묘사된 것 이외에도 화려한 군공이 있었을 것으로 추즉되며, 정사에서의 기록들만으로도 예사롭지 않은 인물.

    삼국지연의에서 묘사되는 관우와 장비의 이미지는 관우는 침착하고 장비는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이지만, 정사 삼국지에서 보이는 모습은 관우는 열혈, 장비는 냉혈로 연의와는 오히려 정반대다. 관우는 언행이 완전히 일치되고 솔직한 사람이었고 장비는 호걸이지만 유비가 우려할 정도로 차가운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관우는 이름 있는 명사들에게는 오만했지만 병졸에겐 관대했고, 장비는 군자는 경애했지만 소인은 돌보지 않았다. 장비에겐 못난 사람을 어루만져줄 포용력이 부족했다. 이는 장비의 인생에서 잘 드러난다.

    • 사로잡히고도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는 엄안을 존중하여 회유했다.

    • 식자로 유명한 유파와 교류하려다 대놓고 모욕을 받고도 그냥 덮고 넘어갔다.

    • 유비가 자신을 추천하는 중신들의 의견을 뿌리치고 병졸 출신 위연을 한중태수로 삼았을 때도 군말없이 수긍했다.

    • 평소 수하들에게 가혹했고 하필 이릉대전을 앞두고 부하인 범강과 장달에 의해 살해당한다.


    군자는 능력이 뛰어나거나 인품이 고결하여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소인은 둘 다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다. 능력과 인품이 모두 평이한 사람이 출세할 확률은 낮으니 장비는 자연스레 부하들에게 가차없는 상관이 되었고, 사대부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소인이 있으면 그들에게는 무례하게 대했다.

    장비가 살았다면 이릉대전은 물론이요, 제갈량의 북벌도 그 판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보는 사람들이 많다. 당장 이릉대전 때 그가 살았다면 거기장군, 영 사례교위라는 그의 직책 상 풍습 대신 대도독이 되어 선봉에 섰을 것이다. 또 제갈량의 1차북벌 때 장비가 살아서 마속 대신 가정을 틀어막았다고 생각해보자. 장비가 철저하게 격파한 적 있는 장합이 상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후에 딸인 경애황후가 죽자 유선의 태자를 낳은 후궁이 있는데도 언니의 뒤를 이어 장황후가 황후가 되었다. 장비의 두 딸이 연속으로 황후가 되는데, 조조가 자기 딸 셋을 황후+후궁으로 들인거 생각하면 촉한에서 장비의 존재감은 정말 대단했을 것이다. 관우는 촉 땅을 밟은 적도 없으니...그럼에도 장비 일가가 외척으로서 촉한 정계에 영향력이 없었다는 것[63]을 생각하면 촉한이 얼마나 공신+외척이 활개치지 못하는 국가인지 알 수 있다.

    출처: 나무위키 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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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비는 범강과 장달이라는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장비는 주로 술을 마신 다음 기분 내키는대로 장정들을 채찍질하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합니다. 장비는 웃사람들에겐 잘했고, 아랫사람들에겐 형편없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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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비는 중국 삼국시대 후기의 유명한 인물 중 하나로, 유비와 함께 맹호총결의 맹우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장비는 유비와 함께 살면서도 자신의 충성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불신으로 받았다는 이유로 광염봉기(光武蹤記)에서 언급되는 "황충협정(黃蟲合璋)"이라는 장면에서 유비의 장수로 투입되어 전투 중에 사망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장비는 유비와 함께 삼천원(三千院)에서 방어전을 벌이던 중 치열한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삼국시대에서는 전쟁과 반란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장비가 전투 중에 사망한 가능성은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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