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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파리매91
똑똑한파리매9123.04.11

롱기누스의 창은 어떤 물건이었나요?

롱기누스의 창이란 말은 많이 들어봤는데, 어떻게 해서 생긴 말인지 궁금합니다. 전쟁에서 많은 승리를 했던 장수가 사용했던 창이었나요?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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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1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롱기누스의 창은 보잘 것 없이 생긴 검은 창이지만 그 안에 간직되어 있는 역사는 만만치 않다고합니다. 성서에는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그 옆구리를 로마의 병사가 창으로 찌른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로마의 병사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였으며 그 당시 사용했던 창이 바로 이 검은 색의 롱기누스 창이었다고 합니다. 이 롱기누스의 창은 예수와 관련하였다는 말 때문에 여러 신지학 추종자들이 탐을 냈고 아마도 큰 힘을 가졌다는 믿음 때문이었으리라생각됩니다. 그들이 주장하기를 이 창은 로마의 기독교 인정 황제인 콘스탄티누스가 부적으로 가졌으며, 아랍인으로부터 유럽을 방어한 샤를 마르텔과 샤를마뉴 황제들도 이 롱기누스 창을 가졌고 그 후 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바바로사도 이 창의 신비한 힘을 믿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롱기누스 창이 유명하게 된 것은 히틀러 때문이었다고합니다. 히틀러 생존당시에는 이 롱기누스 창과 비슷한 성스런 창이 3개정도 있었는데 하나는 로마 교황청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폴란드의 크라코프 성당에 보관되어 있었다고합니다. 이런 성스런 창들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하고 강력한 마력을 지닌 것은 롱기누스의 창이라고합니다.

    히틀러도 어느정도 신지학을 믿었던거 같으며 그는 1910년대에 사귀었던 오스트리아 학자 발터 슈타인에 의해 이 창의 신비함을 전해 듣게 되고 그 후 1938년에 오스트리아를 무력합방 했을 때에 이 창을 손에 넣었다고합니다. 패전이후 이 창은 다시 호프부르크 박물관에 돌아왔지만 기독교의 역사와 함께 이 창은 여전히 신비한 전설로 인하여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있다고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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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롱기누스의 창은 기독교 성유물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롱기누스가 예수의 옆구리를 찌르는 데 쓰인 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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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성창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한 병사가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는데 예수의 피가

    묻었다고 여겨지는 창이다.

    기독교의 성유물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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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독교의 성유물의 하나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롱기누스가 그의 옆구리를 찌르는데 쓰인 창입니다.

    요한목음서 19장 34절 예수의 시신을 창으로 찌른것을 언급하고 그 경위까지 설명하데, 유다인들은 안식일 까지 시체를 십자가 위에 두지 않기 위해 신속히 예수와 다른 두 죄수를 처리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했고 이에 군사들이 예수와 함께 못박힌 2명의 다리를 부러뜨려 강제로 죽였으나 그때 이미 예수는 사망한 상태로 진짜 죽었는지 확인하고자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보았습니다.

    후에 켈트 신화나 게르만 신화에 등장하는 신의 창의 이미지와 결합하여 주변 일대를 초토화시키는 파괴력과 성스러운 치유 능력을 가진 무기로 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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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은 유다교 안식일 전날에 이루어졌다. 유다인 원로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달려있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로마 총독 뽄치오 삘라또에게 탄원하여 며칠씩 걸릴 수도 있는 죽음을 보다 앞당기고자 하였다.

    그 과정을 앞당기고자 로마 병사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두 도둑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께 이르렀을 때, 그들중 한 명은 예수께서 이미 돌아가신 것을 보고 그의 동료들에게 죽음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그의 창을 써서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는데 거기서는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1-37 참조)

    이 행위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메시아는 찌름을 당하고(즈가 12:10 참조) 그의 뼈는 부러뜨림을 당하지 않을 것(탈출 12:46, 시편 34:21, 민수 9:12 참조)이라는 구약에 기록된 오랜 예언의 성취로 여겨진다.

    이러한 상징적 행위의 성취의 도구로써 그리스도의 피에 적셔진 그 창은 엄청나게 신비로운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졌고 그리하여 그리스도교 유물중 사람들이 가장 애타게 찾는 것이 되었다.

    외경인 니꼬데모의 복음서 (안에 있는 삘라또 행전)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렀던 로마 병사의 이름은 가이우스 까시우스 론쥐누스라고 한다. 전승은 그가 창을 타고 흘러내린 피로 그의 시력을 회복한 후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고 전한다. 론쥐누스는 군대를 떠나 수도자가 되었고 마침내는 고문 받아 순교(믿음 때문에 죽음)하게 된다.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유해)은 현재 로마의 아우구스띠노 성당에 남아있다.

    론쥐누스의 창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570년인데 당시의 순례자들은 그것을 예루살렘의 시온산 대성당 안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봤다고 묘사한다. 615년 예루살렘이 페르시아 왕 코스라우의 한 장수에게 함락되었을 때, 그 창은 이교도들의 손에 넘어갔다. 창촉은 떼어져 전 이집트 총독이었던 니췌따스에게 보내졌는데 그는 다시 이것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내 성 소피아 대성당 안에 보관하였다.

    1241년 동로마 황제인 볼드윈 2세는 이 창촉을 채무에 대한 담보로 베네찌아에 보냈다. 볼드윈의 사촌이었던 프랑스 왕 루이 9세는 그 유물에 걸려있던 돈을 다 갚고 그것을 빠리로 가져왔다. 여기서 그 유물은 셍뜨 샤ㅤㅃㅔㄹ르(거룩한 성당)에 거룩하게 보관되었는데 18세기까지 남아있었다. 프랑스대혁명 당시 그 창촉은 몇 개의 다른 유명한 유물과 함께 국립도서관으로 옮겨졌는데 마침내는 사라져버렸다.

    창의 자루 부분은 670년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봤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여기서 그것은 거룩한 무덤 성당(예수께서 묻히셨던 자리에 세워진 성당)에서 공경되었다. 창의 이 부분도 역시 10세기 이전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고 믿을 수 있는 추론도 있는데 그 이유는 여러 순례자들이 그것의 존재를 거기서 분명 확인했기 때문이다.

    투르크인들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을 때 그 유물도 역시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

    1492년 그것은 교황이, 실패했지만 자신을 폐위시키려 했던 형제 지짐을 지지하지 않는 것을 확실히하려는 시도로 술탄 바야젯에 의해서 교황 인노췐치오 8세에게 선물로 보내졌는데, 그는 로도스의 기사단과 나중에는 로마에 도움을 청하였고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술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대우받았다. 교황은 그 유물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받치는 기둥중의 하나 밑에 넣었다. 오늘날 그 유물은 소성당 내 베로니까 상 위에 보존되어 있는데, 사순 제5주일이면 사람들에게 공개된다.

    하지만 그 거룩한 창이라고 여겨지는 유물들은 다른 장소에도 있다. 13세기 이래로 이들중 하나는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서 동쪽으로 22마일 떨어진 코타익 지방의 동굴 속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 수도원은 이교도의 시대(역자 주: 그리스도교 이전을 의미하는 것 같음) 이래로 거룩한 곳이라고 믿어져온 동굴 속의 기적의 샘이 있는 장소에 4세기경 세워졌다.

    그 수도원은 원래 “아이리방크”라고 불려졌는데 이것은 “동굴 수도원”이란 뜻이다. 13세기 이래로 그 이름은 “聖槍의 수도원”이란 의미의 “제가르다방크”로 변경되었다. 어느 시점엔가 창촉은 아르메니아 총대주교의 주교좌가 있는 에크미아드진 대성당으로 옮겨졌는데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것을 거기서 여전히 볼 수 있다.

    그 창은 자루 끝에 다이아몬드 모양의 판이 달려있는데, 그 판에는 그 끝은 불빛 모양의 그리스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역자 주: 원문 사진 참조). 1687년에는 그 유물을 위한 은도금된 보관함이 만들어졌다. 전승에 따르면 그 창촉은 타데오 사도께서 아르메니아로 가져왔다고 한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그 창은 피터 바르톨로뮤라는 한 십자군에 의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1098년 발굴되어 이후 아르메니아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상의 전승들중 어느 것 하나라도 확증해주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 어떤 학자는 주장하기를 그 유물은 실제 로마인의 창이 아니라 그 창을 원형으로 하여 만들어진 창촉이라고 한다.

    그 안에 예수를 못박았던 못을 감추고 있는, 聖槍이라 일컬어지는 또 다른 창(역자 주: 원문 사진 참조)은 폴란드 크라쿠프의 바벨 대성당의 보물창고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독일 황제 오토 3세에 의해 용맹왕 볼레슬라프에게 당시 폴란드의 수도였던 그니에즈노에서 그들이 만났을 때 헌정되었다. 사료에 따르면 이것도 비엔나에 있는 또 다른 창촉을 단지 모사한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성 마우리치오의 창 혹은 합스부르크의 聖槍이라고도 알려진 네 번째 현존하는 창은 비엔나 합스부르크 왕가의 제국의 寶器중 하나였다. 그 창은 못과 함께 금실, 동실, 은실로 묶여있는데(역자 주: 원문 사진 참조), 그 못은 그리스도를 십자가형에 처했던 바로 그 못이라고 한다.

    聖槍에 대한 최초의 확실한 묘사는 이탈리아의 주교 끄레모나의 “루이트프란트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저서에 따르면 독일왕 헨리 1세는 부르군디의 왕 루돌프에게 엄청난 선물을 하사함으로써 926년 그 창을 자신의 소유로 확실히 굳혔다. 1273년 이래로 그 창은 서유럽 황제의 대관식에 쓰였다. 13세기 초엽 교황문헌은 그 유물에 대하여 최초로 언급하고 있고, 14세기에는 그것이 바로 그 수난의 창으로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대략 1354년쯤 황제 챨즈 4세는 금으로 된 튜브 모양의 보관함에 “주님의 창과 못”이라 새기도록 명령했고 聖槍축일도 공식적으로 소개하였다. 20세기 초 그 창은 비엔나의 합스부르크 박물관에 진열되었고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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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롱기누스의 창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동안 옆구리를 찌르는 데 사용된 창으로 여겨지는 기독교 유물입니다.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롱기누스는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찔러 죽인 로마 군인이었습니다. 창은 유물로 숭배되어 왔으며 역사를 통틀어 다양한 전설과 기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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