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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23

어부지리로 왕이 된 중종 시대 조광조의 개혁 정치와 기묘사화 원인과 결과에 대해 궁금합니다.

어부지리로 왕이 된 중종 시대 조광조의 개혁 정치와 기묘사화 원인과 결과에 대해 궁금합니다.

그리고 중종반정이 성공하게 된 배경도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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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광조의 개혁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광조(趙光祖)는 군주가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을 과감하게 시행할 것을 역설하였다. 국가운영 내지 통치에 있어서 군주의 마음 [君心]을 중시하는 조선 초기 이래의 사상 경향을 계승하면서도, 중기에 들어서면서 여러 면으로 누적된 폐단을 시정하려는 조광조의 개혁 의식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군주에게 내면의 수양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면의 생각을 실제 사업으로 과감하게 실천할 것을 요구하여,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던 기묘사림의 영수의 입장이 담겨있다고 하겠다. 『주역』에서 "경으로써 안을 바르게 하고 의로써 밖을 바르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는 구절을 원용하면서 내면의 수양과 외면적 실천의 조화를 주장하고 있지만, 내면적 수양이 외면적 실천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논의에서 상대적으로 외면적 실천을 더 강조하고 있다.

    임금의 학문은 한 마음을 맑고 밝게 하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요, 마땅히 모든 시책을 행하는 데 나타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임금의 학문이 이미 고명한 데 이르렀으니 만일 이러한 기회를 잃어버린 뒤에는 다시 도모하지 못할 것입니다. 모름지기 한두 대신과 더불어 과거와 현재를 참작하여 과감하게 행해야 합니다. 만일 헛되이 경연에서 논란만 하고 사업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석씨(釋氏)의 학문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나 사업에 옮기는 것만 우선하여 자신의 수양(自修)에 힘쓰지 않는 것도 안됩니다. 경(敬)으로써 안을 바르게 하고 의(義)로써 밖을 바르게 한다면, 안과 밖이 서로 길러질 것입니다. (趙光祖, 「復拜副提學時啓(十月)」, 『靜菴集』 4-5ㄱ~ㄴ)

    조광조는 지치주의 정치의 업적은 다방면에 걸쳐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이상주의적인 왕도정치는 구현 과정에서 저돌적이고 급진적인 면이 많아 도리어 증오와 질시를 사게 되었다. 게다가 철인군주(哲人君主)의 이상과 이론을 왕에게 역설한 것이 강요의 인상을 주어 왕마저도 그의 도학적 언동에 대해 점차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 성리학을 지나치게 숭상한 나머지 고려 이래 장려된 사장(詞章)을 배척, 남곤·이행(李荇) 등의 사장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렴 결백과 원리 원칙에 입각한 도학적인 태도는 보수적인 기성 세력을 소인시해 훈구 재상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당시 반정중신으로서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이에 조광조 일파에 대한 기성 훈구세력의 불평 불만은 1519년 반정공신 위훈삭제사건(反正功臣僞勳削除事件)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즉 이 사건은 중종반정공신 가운데 그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므로 공신호를 박탈해야 한다고 하여,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인의 공신호가 삭퇴되고 토지와 노비마저 환수한 조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광조의 개혁론 (조선 전기 경세론과 불교비판, 2004., 강중기), 기묘사화 [己卯士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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