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신동진 경제·금융전문가입니다.
초기부터 바이마르 공화국은 혼란이 계속되었다. 독일 정부가 패전의 책임을 맡지 않기 위해서 연합정당에 정권을 떠맡기다시피 하여 수립되었기 때문에 명목상의 문제가 존재했다. 여기에 베르사유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식민지를 잃고 1,300억 마르크에 달하는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베르사유조약으로 독일이 내주어야 할 지역은 알자스, 프로이센, 포젠 등이었고 그 밖의 지역은 연합군의 감시 하에 놓이거나 국제연맹의 위임으로 소유 여부가 결정될 처지였다.
대전 중 발생한 다른 국가의 손실까지 책임을 져야 했으므로 인플레이션 상황이 심각하여 많은 사람들이 생활고에 시달렸다. 화폐 가치가 지나치게 떨어지고 일용품과 식량 부족 상황에 처하게 되자 슈트레제만 총리의 노력으로 베르사유 조약이 다소 수정된다.
이후 인플레이션은 유지되었으나 배상지불을 연장하는 도스안, 로카르노 조약 등을 통해 잠시나마 안정기를 갖게 된다. 1925년 힌덴부르크의 당선을 통해 공화국의 안정적 발전이 이루어지고, 독일 내부의 우익적 정치성향이 우세하게 된다. 외국자본을 유입하여 공장이 재정비되었고, 생산에 주력하여 경기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과학과 학문, 예술 등의 측면에서도 발전을 보였고 1925년에는 국제연맹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선정, 1926년에 가입하기도 한다.
그러나 1929년 증권시장의 붕괴로 인해 세계공황이 찾아오고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자본 회수로 인해 독일 내부는 다시금 혼란스러워진다. 실업자가 증가하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당시 세력을 장악하고 있던 사회민주당은 사람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1930년에 내각을 해체하기에 이른다.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후 선거가 실시되어 힌덴부르크가 재당선된다. 그러나 독일 내부의 중산층들과 보수파들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쌓인 불신으로 인해 대부분 나치스당을 지지하였고, 아돌프 히틀러 또한 힌덴부르크와 엇비슷한 지지율을 증명함으로써 나치스를 중심으로 한 결속이 굳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