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사주팔자 또는 토정비결 등 역술이 언제부터 등장했나요?
우리나라 역사에서 사주팔자, 토정비결, 관상 등 언제부터 이런 역술 또는 점성술 등이 등장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들이 어떻게 전해져 왔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단 토정비결과 관상학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릴게여.
토정비결은 미래를 예측하거나 점을 치는 방법을 적어둔 책으로 점술책으로 볼 수 있습니다. 토정비결은 중국 점술의 기반이자 동양 철학의 큰 영향을 준 주역을 기초로 두어 음양설을 따르는 책으로 중국의 주역과 흡사한 점은 많으나 완전히 같지는 않다고 합니다. 특히 점괘를 보는 계산 방식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하네여. 토정비결은 사람의 생년월일로 그해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방법을 다루며
토정비결의 제목은 조선의 학자 이지함의 호 토정에서 따 온 것인데 그는 신기하게도 1517년에 태어나 1578년 정확하게 환갑의 나이에세상을 떠났다고 하네여. 그는 자신의 아내에 관한 예견과 임진왜란과 임진강의 범람, 자신의 죽음까지 예견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지함은 생활도 기인처럼 흙담집에 살아 호가 '토정(土亭)'이 됐다고 하지요.점술과 의학에 능한 것으로 소문이나 이지함을 찾는 사람들이 당시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관상학은 중국에서 도교를 수입하며 관상학을 처음 접했다고 합니다. 중국의 관상학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수입된 것은 7세기 초 신라의 선덕여왕 때이구요. 당시의 스님들이 달마상법을 배워 고관대작들의 상을 보고 미래의 일을 점을 쳐 주었다고 하구요. 영화 관상에서도 유명하게 된 말
" 내가 왕이 될 상인가?" 라는 대사처럼 고려 말 승려 혜징이 이성계의 상을 보고 왕이 될 것을 예언했다고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토정 이지함은 고려말의 충신 목은 이색의 후손이면서 율곡 이이와 함께 서경덕의 제자로 주자학에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이흥남과 이홍윤의 사소한 다툼과 술사의 불충한 말을 빌미로 간신 윤원형이 확대시켜 장인인 이정랑이 역모의 괴수가 되고 장인과 처남들이 죽고 장모와 처남댁들이 종으로 팔려가는 모습을 보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후에 포천현감과 아산현감을 함) 마포강변에 흙담 움막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토정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고 소문이 나서 찾아와 1년 신수를 봤달라고 하였고 원래 주자학자였으나 사상적 개방성을 지닌 인물였기에 주역은 64괘지만 그가 지은 토정비결은 48괘로 점을 치는 독자적인 복서를 만들어서 점을 본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예언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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