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최초 왕이 누군지 궁금해요
영국 최초 왕이 누구였는지와
아더왕이 어느나라 왕이 였는지
어떤 인물이었는지 궁금하니 자세히 답변
해주시면 감사합니다1
안녕하세요. 거북이놔두루미입니다.
메리1세와 엘리자베스1세는 다행히 6번째 왕비의 도움을 받아 왕위계승자로 인정받는다. 1547년, 헨리8세 사후 에드워드6세가 왕위에 오르지만 6년만에 요절하고 만다. 메리1세가 뒤를 이었고, 공식적으로는 영국 최초의 여왕이 됐다.
영국 왕조
▶ 왕조의 시대 순서
고대 시대
중세 시대 - 앵글로. 색슨 7왕국 시대 시작 - 앵글로 색슨 왕조 - 노르만 왕조 - 플랜테지넷 왕조
근세 시대 - 랭카스터 . 요크 왕조 - 튜더 왕조 - 스튜어트 왕조 - 하노버 왕조
현대 시대 - 윈저 왕조
......
<1> 고대시대: 켈트(Celt) 족의 정착과 로마제국의 지배
☞ 켈트 족 거주, 케사르의 원정(B.C. 55) - 로마의 통치를 받음.
기원전 4세기경부터 영국 땅에는 켈트족이 거주한다.
영국 땅에 자리잡은 켈트족은 씨족들이 모여 사는 부족국가로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55년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자르의 침략으로 영국의 남쪽은 로마제국의 영토에 속하게 된다. 로마군대는 템스강가 평야에 요새를 세우고 영국을 지배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수송하는 기지로 쓰게 되는데 이 항구의 이름을 ‘론디니움(Londinium)’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뒷날 영국의 수도 ‘London’이 된다.
켈트족은 로마의 앞선 문명을 접하자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자 애썼고 차츰 켈트족과 로마인은 섞이게 되어 영국에는 라틴문화가 일찍이 뿌리 내렸다.로마의 정복 후에 약 300년동안은 전쟁 없는 로마의 평화태평성대(Pax Romana)가 지속되었다.
<2> 중세 시대: 앵글로 색슨(Anglo Saxon) 시대
♣ 앵글로 색슨 왕조
◈ 웨섹스가(Wessex 家)
(1) 엑버트 (829 ∼ 839)
(2) 에델울프(839 ∼ 858)
(3) 에델볼드(858 ∼ 860)
(4) 에델버트(860 ∼ 866)
(5) 에델레드 1세(866 ∼ 871)
(6) 알프레드 대왕 (871 ∼ 899)
(7) 에드워드1세(899 ∼ 924)
(8) 에델스탄(924 ∼ 940)
(9) 에드먼드 1세(940 ∼ 946)
(10) 에드레드(946 ∼ 955)
(11) 에드위(955 ∼ 959)
(12) 에드거(959 ∼ 975)
(13) 에드워드(975 ∼ 978)
(14) 에델레드 2세(978 ∼ 1016)
(15) 에드먼드 2세(1016)
◈ 댄가(Dane 家)
(16) 카누트 대왕(1016 ∼ 1035)
(17) 하롤드 1세(1035 ∼ 1040)
(18) 하르디카누트(1040 ∼ 1042)
(19) 에드워드(1042 ∼ 1066)
(20) 하롤드 2세 (1066)
<3> 노르만 족의 정복 : 노르만 공국이 왕위 계승
♣ 노르만 왕조(1066 ∼ 1154)
롤로(조대 노르망디 공) - 윌리엄 - 리처드 1세 - 리처드 2세 - 로버트
(1) 윌리엄 1세 (정복왕 1066 ∼ 1087)
(2) 윌리엄 2세 (1087 ∼ 1100)
(3) 헨리 1세(1100 ∼ 1135)
(4) 스티븐(1135 ∼ 1154)
바이킹 족이 프랑스 왕에게 신하임을 맹세하고 노르망디(Normandy)에 자리잡은 것은 911년.
그 후 100년이 지난 뒤 노르망디 왕에 오른 이가 William이었다.
노르만 족은 100년이 흐르는 사이 완전히 프랑스화되어 있었고, 1066년 노르망디 공 윌리엄의 영국 정복은 프랑스의 영국 정복이나 다름없었다.
덴마크도 영국을 침략했으나 그들은 앵글로색슨족과 비슷해 영국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으나,
노르만 족의 영국 정복은 로마제국에 이은 라틴문화의 두 번째 정복이었다.
이때 영국은 언어, 풍습, 정치, 문화 등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윌리엄은 영국 정복 후에 William Ⅰ세로 노르만 왕조를 열었고, 영국의 모든 권력은 노르망디에서 건너온 귀족들의 손에 들어간다.그러면서 왕실과 귀족들은 자연히 프랑스 말을 쓰고, 라틴어가 교회와 행정기관의 용어가 되었다.
영어는 평민과 농민들이 쓰는 말로 구분되어 영어는 이때 프랑스어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정복왕 윌리엄 1세(William the Conqueror)는 영국 왕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왕의 신하였다.
그러나 노르만 족의 왕들은 프랑스 내에 영토를 계속 넓혀가 프랑스 왕보다도 더 넓은 땅을 차지하기에 이르고 이것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윌리엄 1세는 왕이 된 후 반란을 진압하고, 몰수한 땅을 기사에게 나누어주는 노르만식 봉건 제도로 통치하였고, 중세 영국의 특징인 집권적 봉건 국가의 기초를 다졌다.
자문회는 왕의 의견을 청취하고 승인할 뿐, 법률과 재판은 왕이 직접 관장하였으며, 경제 체제도 마찬가지로 왕 중심이었다.
정복왕 윌리엄 1세의 두 아들인 William 2세(10871100 재위)와 Henry 1세(110035 재위) 때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가 계속되었으며,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와의 유대가 강화되었다.
전반적인 견지에서 볼 때 노르만 시대는 건설적인 시대였다.
경제는 본질적으로 농업을 위주로 했고, 도시들이, 그 중에서도 특히 런던이 번성했다.
교회는 대륙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럼 대성당이나 런던 탑 같은 훌륭한 건물, 윈체스터의 성서와 〈시편〉의 장식 글씨는 이 시대의 뛰어난 건축과 미술 솜씨를 보여준다
<4> 플랜태저넷 왕가<House of Plantagenet> (1154~1399) : 프랑스 앙주의 백작 출신 왕
영국왕은 영국, 노르망디, 앙주, 아키텐, 가스코뉴, 오르베뉴, 툴루즈를 다스리게 되어
프랑스왕보다 더 큰 영토를 소유 했지만 법적으로 프랑스의 신하였다
♣ 플랜테지넷 왕조(1154 ∼ 1399)
(1) 헨리 2세(1154 ∼ 1189)
(2) 리처드 1세(1189 ∼ 1199)
(3) 존(無領王 1199 ∼ 1216)
(4) 헨리 3세(1216 ∼ 1272)-막내 아들인 '곱사등이' 에드먼드가 1267년 랭커스터 공
다섯 번 째 아들인 요크공작 1세 랭리의 에드먼드(요크 공)
(5) 에드워드 1세(1272 ∼ 1307)
(6) 에드워드 2세(1307 ∼ 1327)
(7) 에드워드 3세(1327 ∼ 1377) - 에드워드 흑태자 1376 死/존(랭카스터 공)=리처드 2세의 삼촌
(8) 리처드 2세(1377 ∼ 1399)=>존(랭카스터 공)의 아들 헨리 4세(랭카스터 가) 왕위계승
=>이후 장미전쟁을 거쳐
=>요크공작 1세 랭리의 에드먼드의 후손.. 요크 공작 3세의 아들이
요크가 왕위 계승 에드워드 4세
=>이후 랭커스터의 혈통은 존의 서자인 "보퍼트 가문"의 후손
헨리 7세로 이어져 튜더 왕조(웨일즈 출신)
2) Richard 1세(1189-1199)
헨리 2세의 3째 아들이다. 아버지가 동생(존 왕자)을 사랑하여 가장 좋은 프랑스 남부를 주려고 하자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냈다.
십자군 3차 원정시에 사자왕으로 이름을 날리고 영화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왕이 바로 리처드1세이다. 예루살렘근교에서 살라딘과 싸워 물리쳤고 그의 용맹성은 ‘사자왕 리처드’라는 별명을 갖게 하였다. 그는 온갖 파란만장한 모험 끝에 프랑스에서 필립스2세와 싸우다가 1199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10년 재위 중에 1/2년만 영국에 있었고, 나머지는 전쟁터에서 살았다. 정치에는 무능하였으나 전형적인 기사로서 존경을 받은 왕이었다.
별칭은 사자심왕(獅子心王) 리처드(Richard the Lion heart, Lionhearted/Richard Coeur de Lion).
☞ 근세 시대(장미 전쟁)
<4-1> 랭커스터 왕가 The House of Lancaster : 빨간 장미
♣ 랭카스터
◈ 랭카스터가(Lancaster 家)
(1) 헨리 4세(1399 ∼ 1413)
(2) 헨리 5세(1413 ∼ 1422)
(3) 헨리 6세(1422 ∼ 1461)
<4-2> 요크 왕가 The House of York : 흰장미
◈ 요크가(York 家) : 짧디 짧았던 25년간의 요크가 왕조
(4) 에드워드 4세(1461 ∼ 1483)
(5) 에드워드 5세(1483)
(6) 리처드 3세(1483 ∼ 1485)
<5>튜더 왕조 The House of Tudor (1485-1603) :웨일즈 출신의 잉글랜드 왕가
♣ 튜더 왕조(1485 ∼ 1603)
리처드 3세(요크가) = 마거릿(랭카스터가)
(1) 헨리 7세(1485 ∼ 1509) = 엘리자베스(에드워드 4세의 딸)
(2) 헨리 8세(1509 ∼ 1547)
(3) 에드워드 6세(1547 ∼ 1553)(시모어의 아들)
(4) 메리 여왕(1553 ∼ 1558)(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캐서린의 딸)
(5) 엘리자베스 여왕(1558 ∼ 1603)(앤불린의 딸)
6) Elizabeth 1세(1558-1603)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인 앤 볼레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바다와 강력한 함대의 중요성을 깨닫고 세계의 바다를 지배할 강력한 함대의 건설을 이룩한 것이었다.
영국은 이 함대를 뒷받침으로 뒷날 온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세계제 1의 대영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새로 발견된 대륙에서 각종 보물을 확보하고 있었고, 영국은 이를 빼앗아 도망치는 해적질을 강행하게 된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리란걸 깨달은 엘리자베스 1세는 이를 격려하였고, 따라서 대담무쌍한 해적질을 감행한 Francis Drake에게 귀족 작위를 내리게까지 된다.
에스파냐가 이를 묵인할리 없었고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는 그동안 종교적인 영향이 큰 것으로 엘리자베스가 영국의 국교를 다시 성공회로 정함으로써 이미 두 나라 사이는 종교적으로도 크게 갈라져 있었다.
강력한 함대를 거느리고 식민지의 보물과 황금을 차지하려고 하는 에스파냐와, 새로 해외로 손을 뻗으려는 영국 사이의 힘의 충돌은 결국 전쟁을 초래했다.
엘리자베스는 영국 해군 사령관에 임명한 해적 Drake에게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을 당부했다.
결국 뛰어난 전술을 이용해 영국은 에스파냐를 꺾고 아메리카와 그 밖의 동양과 아프리카 등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독점하여 무역하던 지역에 손을 뻗게 된다.
그리고 1600년에는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군대를 등에 업은 무역, 즉 무력을 이용한 무역을 함으로써 식민지를 철저히 착취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1세는 국민들에게 큰 세금을 거두지 않고도 무역에서 생긴 이익금으로 훌륭히 나라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의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왕의 위선과 권위는 더욱 당당해졌다.
나라 안과 밖으로 태평성대가 계속되고 나라 살림이 윤택해지면서 영국의 문화는 크게 꽃을 피워 ‘William Shakespear'같은 위대한 작가가 태어난 것도 바로 이 시대였다.
<6> 스튜어트 왕조(1603 ~1714) : 스코틀랜드 출신 왕위 계승
♣ 스튜어트 왕조(1603 ∼ 1714)
(1) 제임스 1세(1603 ∼ 1625)
(2) 찰스 1세(1625 ∼ 1649) - (청교도 혁명<1649>. 공화정 시대<1649 ∼1660> ) - (왕정복고<1660>)
(3) 찰스 2세(1660 ∼ 1685)
(4) 제임스 2세(1685 ∼ 1688)
(5) 메리 여왕(1688 ∼ 1694)와 윌리엄 3세(1688 ∼ 1702)의 공동 통치
(6) 앤 여왕(1702 ∼ 1714)
<7> 하노버 왕조(1715-1916) : 독일 출신 왕위 계승
♣ 하노버 왕조(1714 ∼ 1917)
(1) 조지 1세(1714 ∼ 1727)
(2) 조지 2세(1727 ∼ 1760)
(3) 조지 3세(1760 ∼ 1820)
(4) 조지 4세(1820 ∼ 1830)
(5) 윌리엄 4세(1830 ∼ 1837)
(6) 빅토리아 여왕(1837 ∼ 1901)
(7) 에드워드 7세(1901 ∼ 1910)
1)조지 1세(1714-27)
독일태생이라 영어를 몰라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그는 결국 정치를 국회에 일임하게 되고
이때부터 현재 세계 여러 나라가 본받고 있는 ‘내각책임제’가 출발한 것으로 본다.
이는 국왕은 나라의 주인이되 사실상 정치의 뒷전에 물러나 있고 권력은 국회와 선출된 수상이 쥐게 되어 ‘국왕은 군림하나 지배하지 않는 입헌군주국’의 기초가 되는 셈이다.
결국 국민이 뽑아낸 대표 가운데 가장 똑똑하고 덕망 있는 사람이 정권을 쥐고 이 사람이 잘못하면 언제든 새로운 수상으로 교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다른 나라들보다 힘찬 발전을 해나가게 된다.
♣ 윈저 왕조(1917 ∼ )
(1) 조지 5세(1910 ∼ 1936)
(2) 에드워드 8세(1936)
(3) 조지 6세(1936 ∼1952)
(4) 엘리자베스 여왕(1952 ∼ )
1901년 하노버왕가의 여왕 빅토리아가 죽자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에서 왕위를 이었으며,
1917년에 윈저왕가로 이름을 바꾸었다.
작센-코부르크-고타는 빅토리아의 남편 앨버트 공(1819~1861)의 성이다.
4)엘리자베스 2세(1952-현재)
본명 Elizabeth Alexandra Mary. 1926년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윈저왕가의 조지 6세의 장녀이다.
1947년 에든버러공(公) 필립과 결혼하여, 이듬해 11월 큰아들 찰스(찰스 필립 아서 조지)를 낳았다.
1952년 2월 뉴질랜드 방문 중 아버지 조지 6세의 급서로 귀국하여 남동기가 없었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1953년 6월 웨스트민스터대성당에서 성대한 대관식(戴冠式)이 거행되었는데, 연합왕국(聯合王國)의 왕이자 자치령 각국의 왕이며 나아가 구제국(舊帝國)에 속한 독립국들의 결합체인 코먼웰스의 수장(首長)으로서 대관한 최초의 왕이 되었다. 이후 영국 국왕으로서의 다망한 정무를 처리하는 한편, 수많은 외국방문으로 세계 각국과의 우의를 다졌다.
슬하에 황태자인 찰스와 차남 앤드류(1960~), 3남 에드워드(1964~)와 장녀 앤(1950~) 등 3남 1녀를 두었다.
2002년 2월 6일 즉위 50주년 축하행사로 황금마차 퍼레이드, 기념주화 및 축하복권 발행, 여왕부부의 영연방 국가 순방 등을 가졌으며, 역대 왕 중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엘리자베스 1세에 이어 영국민에게 신뢰와 인기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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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왕(King Arthur), 아더 왕 또는 아서 펜드래곤(Arthur Pendragon)은 고대 브리튼 지역에서 브리튼인들을 이끌었다고 전해지는 전설 속의 인물이다.
'아서 왕'이나 '아서 왕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이 실존했다면, 그는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부터 6세기초까지의 기간 동안 활약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서는 앵글족과 색슨족의 침입에 맞서 브리튼을 방어하기 위해 분투하는, 군담(軍談)적 살신성인에 해당하는 공을 세웠을 것이다. 아서 왕이 창작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도 '당시 브리튼족의 멸족과 망국에 대한 위기감, 구원자에 대한 열망이 전설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는 데는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영웅 서사를 정비하여 중세 유럽에서 아서 왕 전설이 만들어졌다. 아서 왕 전설은 오랫동안 서양 세계 음유시인과 문학가들에 의해 널리 사랑받았고, 오늘날에도 문학적 영감의 소재로 꾸준히 이용되고 있다.
중세 영국에서는 예수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중세기 문학과 예술에서 이른바 영웅의 본보기, 기사도 정신의 원천으로서 그를 중요하게 다루었으며, 중세의 아홉 위인(Nine Worthies) 중 하나로 칭송을 받았다. 나머지 여덟명은 헥토르, 알렉산드로스 대왕, 율리우스 카이사르, 다윗, 여호수아, 유다 마카베오, 카롤루스 대제, 고드프루아 드 부용.
이름이 언급된 최초의 문헌은 웨일스어 문헌인 《어 고도딘(Y Gododdin)》으로 추측된다. 남아있는 사본은 13세기의 것이지만 원본은 가장 이르게 작성된 부분은 7세기, 대부분은 9~10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서 왕에게 구체적인 생애를 부여한 몬머스의 제프리 이전에는 초자연적인 존재와 싸우거나 웨일스 민속 영웅의 왕으로 나오는 등 민속적인 면이 강했으나 프랑스에서 아서 왕 전설이 기사도 문학으로 바뀌고 원탁의 기사들이 활약하면서 비중이 낮아진다.아서 왕 전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호수의 요정 등 다양한 조력자에게서 구한 여러가지 신비한 무기들이다. 그 유명한 전설의 검 엑스칼리버를 비롯한 그의 무구 전설은 중세 기사도 문학의 서사 전개 방식에 중요한 소재로 작용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정통 판타지 소설의 클리셰가 되고 있다.
그대가 말하는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리라. 바람이 불고, 비가 젖고, 태양이 회전하며, 바다가 에워싸고, 땅이 이어지는 한. 다만 오직 내 배와, 내 망토, 내 검 칼레드불흐(=엑스칼리버), 내 창 흐롱고머얀트, 내 방패 위넵구르투헤르, 내 단검 카른웬하이, 그리고 내 아내 그웬휘바르(=기네비어)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Thou shalt receive the boon whatsoever thy tongue may name, as far as the wind dries, and the rain moistens, and the sun revolves, and the sea encircles, and the earth extends; save only my ship; and my mantle; and Caledvwlch, my sword; and Rhongomyant, my lance; and Wynebgwrthucher, my shield; and Carnwenhau, my dagger; and Gwenhwyvar, my wife.아서 왕이 사촌동생 킬후흐에게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며 한 말. 영문 번역은 Lady Charlotte Guest에서 발췌.
구스화이트(Goosewhite): 강철로 만들어진 투구. 수많은 보석들이 황금으로 고정되어 있고, 한때는 우서 펜드래곤의 소유였던 무구. 모든 것 중 매우 희귀한 것이었기에 구스화이트라고 불렸다.
엑스칼리버(+검집)
위가르(Wygar): 강철 그물로 장식된 사슬갑옷. 요정의 장인이 탁월한 기술로 지은 것으로, 지혜로운 자가 만들었다 하여 위가르라 불렸다. 그리고 강철 넓적다리 가리개 등등은 아발론에서 마법의 능력을 부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칼리번이 있었을 당시에는 위가르를 착용하고 칼리번은 옆구리에 찼다고 한다. 작가 라야먼은 그의 작품에서 아서 왕의 갑주(구스화이트, 위가르)에 대해 화려하게 묘사했고, 같은 12세기의 로버트 와스(Robert Wace)도 유사한 글을 썼던 반면, 정작 라야먼과 와스가 아서 왕이라는 소재를 얻은 몬마우스의 제프리는 아서 왕의 갑옷을 묘사하지 않았다. 투구에 대해서는 드래곤이 새겨진 황금 투구를 썼다고 적었지만, 갑옷의 경우에는 아서 왕이 갑옷을 입었는지 자체를 생략한 채 가죽 조끼(leather jerkin) 차림으로 전투에 나섰다고 기록했다. 즉, 제프리의 기록을 종합하면 아서 왕은 가죽 조끼에, 황금 드래곤 투구를 쓰고,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방패 프리드웬을 들고, 장검 칼리번을 차고, 그의 창 론을 쥐고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이 된다.
카른웬난(Carnwennan): 아서 왕의 단검. <킬후흐와 올루웬(Culhwch ac Olwen)>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아서 왕이 킬후흐에게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말하면서 "다만 절대 줄 수 없는 것들"의 목록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매우 귀중한 보물이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모험의 과정에서 아서 왕이 동굴 속에 사는 마녀 오르디(Orddu)를 이 단검으로 "단칼에 둘로 쪼개어 반으로 갈랐다"(clove her in twain so that she fell in two parts)는 기록이 있듯이, 전설의 무기에 걸맞는 스펙을 보여준다. 또한 웨일스의 삼제가 중 아서 왕궁의 기사들의 삼제가에서는 하나님께서 아서 왕에게 내리신 세 가지 신성한 무기를 들면서 "그의 창 롱고미안트, 그의 검 칼레드풀흐(=엑스칼리버), 그의 단검 카른웬난"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보면 카른웬난은 아서 왕 전설에서 일종의 삼종신기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지만, 장검이나 창에 비해 단검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임팩트가 적어서인지 웨일스 밖에서는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투명 망토(or 그웬(Gwenn)): 웨일스 신화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망토. 아서 왕에게는 그 착용자를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마법 망토가 있는데, 엑스칼리버나 롱고미니아드 등과 함께 쿨후흐에게 절대로 넘겨줄 수 없는 보물들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한다. <프러다인 섬의 열세 가지 보물(Tri Thlws ar Ddeg Ynys Prydain)>은 이 망토를 열세번째 보물이라고 지칭하며,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밖에서 보이지 않지만, 그 자신은 모두를 볼 수 있다"(whoever was under it could not be seen, and he could see everyone)라고 간결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12세기 웨일스의 <로나뷔의 꿈(Breuddwyd Rhonabwy)>에서는 망토가 아니라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양탄자 그웬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아서 왕의 앞에 양탄자를 펼쳤는데, 각 모서리에 불그레한 금빛의 사과가 있었고, 그는 양탄자 위에 의자를 놓았다. 그 의자는 너무나 거대했기에 세 명의 무장한 전사들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양탄자의 이름은 그웬이었는데, 그 위에 있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모두를 볼 수 있었다.
And he spread the carpet before Arthur, and there was an apple of ruddy gold at each corner thereof, and he placed the chair upon the carpet. And so large was the chair that three armed warriors might have sat therein. Gwenn was the name of the carpet, and it was one of its properties that whoever was upon it no one could see him, and he could see every one.아서 왕이 그래서 이 신비한 양탄자를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 하면, 오웨인 경과 거기 앉아서 체스를 두는 것이다. 망토든 양탄자든 간에 상당히 흥미로운 기능을 지닌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킬후흐와 올루웬>, <로나뷔의 꿈>에서는 이 물건 자체가 스토리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무구가 너무 사기여서 묻히기라도 한 듯.
프리드웬(배 또는 방패)
전설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시기의 역사는 로마 제국의 약화로 로만 브리튼으로부터 로마 군단이 철수한 5-6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영국사에서도 이 당시의 역사서나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모든 사건은 이후의 사료와 고고학적 발굴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야만족이었던 앵글로색슨족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자기 기록을 남길 정도로 문명화되는 8세기 말이 되면 이와 반대로 사료가 많아져서 아서의 모델이 되는 여러 인물들을 추정할 수 있다.
5세기 중반 브리튼 제도의 민족 분포
게일인 - 초록색
픽트족 - 파란색
로마 군단이 철수한 힘의 공백 아래 로마화된 켈트족인 브리튼인들은 야인(野人) 켈트계인 픽트족, 스코트족의 잦은 약탈로 피해가 막심했다. 그러던 와중 앵글족과 색슨족, 주트족, 프리시족 등 게르만계 부족들까지 북해를 건너 오면서 섬 안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중세 영국 수도사 길다스(Gildas), 넨니우스(Nennius)의 기록에 따르면 브리튼인들의 왕 보티게른(Vortigern)이 픽트족과 싸울 용병으로 활용하기 위해 색슨 족의 족장 헹기스트(Hengist)와 호르사(Horsa) 형제를 브리타니아에 불러들이고,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헹기스트의 딸 로웨나(Rowena)와 결혼했으나 헹기스트 형제가 보티게른을 배신하고, 브리튼인들을 학살하며 색슨족을 브리타니아에 정착시켰다고 한다.
보티게른의 아들들인 보티메르(Vortimer)와 카티게른(Catigern)이 맞서 싸워 호르사를 죽였으나 그들도 헹기스트와 로웨나의 암수에 당해 죽고 말았으며, 이로 인해 브리튼인들은 웨일스로 밀려나고 색슨족이 브리타니아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브리튼인들의 저항은 6세기경 그레이트브리튼 섬에 페스트로 추정되는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상륙하면서 크게 좌절되었으며, 이미 구 브리타니아의 수도 론디니움(Londinium, 현재의 런던)은 전쟁터가 되어 수도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8]. 전쟁은 7~8세기가 되어서야 어느 정도 정리된다. 최후의 승자는 앵글로색슨족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아서왕 전설이 왕의 죽음과 브리튼인들의 동족상잔, 브리튼 왕국의 몰락으로 끝나는 것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후 앵글로색슨족은 잉글랜드 대부분을 차지하고, 동쪽에 남아 있던 브리튼인들을 동화시키거나 추방하면서, 칠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이후에 이들은 바이킹과 노르만족의 침입을 받고, 이들의 지배를 받았지만, 이들도 최후에는 앵글로색슨족에 동화되었으며, 잉글랜드의 지배층은 현대의 윈저 왕조에 이르기까지 게르만 계열이다. 로마화된 브리튼인들은 웨일스와 브르타뉴와 콘월 등으로 밀려나거나 혹은 동쪽에 남아있던 브리튼인들의 경우 앵글로색슨족의 지배를 받다가 동화되었다.1520년대에 만들어진 아서의 동상. 고증에 맞지 않게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하고 있다.
역사 속 아서 왕의 후보
아서 왕의 모델은 이런 혼란스러웠던 잉글랜드의 상황에서 앵글로색슨족의 침략으로부터 브리튼인들을 일시적으로나마 구원한 "어떤 브리튼인 영웅"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바돈 산 전투 등 앵글로색슨족의 공세가 한 세대 정도 극도로 위축되었던 정황이 기록 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나 나타나므로, 그러한 인물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이 설에 근거해서 여러 인물들이 아서 왕의 모델이 되지만, 그 인물의 존재나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
아서 왕의 시대를 살아간 길다스 사피엔스(500?~570?)의 《브리튼의 멸망과 정복》에는 어디에도 '아서 왕'이 기록되지 않았으며, 아서 왕보다 2세기 후의 《브리튼 부족사》에서야 최초로 '앵글로색슨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사령관 아서'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왕'이 아닌 전투지휘관이며, 200년 후의 기록이라는 점을 보면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적어도 6세기경 바돈 산 전투에서 브리튼인들은 앵글로색슨족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로 인해 적어도 100년 이상 앵글로색슨족의 공세가 위축되었다는 것에는 동의를 하지만, 이 당시의 지휘관이 아서 왕인지는 고사하고 전투가 벌어진 바돈 산이 어디인지조차 알 방법이 없다. 따라서 역사가들은 아서 왕의 존재 자체에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료가 부족한 고대의 이야기가 늘 그렇듯, "6세기 중반 아서라는 이름의 지도자가 앵글로색슨족을 막아냈다"는 이야기 자체가 완전히 허구라고 볼 이유도 없다. 우선 브리튼인들은 6세기경 지휘관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앵글로색슨족의 공세를 100년 이상이나 늦춘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 무렵 다른 기록에서 '아서'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즉,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따라짓는 당대의 유행을 감안한다면 바돈 산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도자의 이름이 아서라고 볼 만한 약간의 심증도 존재한다.
참고로 1981년의 영화 "엑스칼리버"는 아서 왕 전설을 집대성했다고 보는 토머스 말로리의 15세기의 저서 《아서 왕의 죽음》(Le Morte D'Arthur: 제목은 불어지만 실제론 영어로 쓰임)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하여 배경은 시기를 알 수 없는 중세로 되어 있으며, 이는 중세 기사도 문학의 대표작이다. 대부분의 아서 왕 영화가 고대가 아니라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따라서 그가 실존 인물이라면 저런 플레이트 아머는 입었을 가능성은 없다. 5~6세기 무렵 로마와 그 영향을 받은 야만 왕국들은 사슬갑옷이나, 찰갑, 어린갑 등의 여러 조각들을 엮은 갑옷을 애용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대에서는 아서가 로리카를 입고 있는 것으로 재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서가 로마 영향권의 브리튼인이었다면 드루이드 교도가 아니라 기독교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드루이드교는 로마 지배 당시부터 탄압을 받았으며, 4세기 말에 로마의 국교가 기독교가 되면서 아예 이교는 로마의 영역 내에서 박멸되기 때문이다. 다만 410년에 로마가 브리튼에서 철수하면서 박멸까지는 가지 못했기에 색슨족에 맞서 연합을 하는 조건으로 최소한 접촉을 했을 가능성은 있다.
아서 왕은 브리튼인들의 왕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아서의 적이었던 앵글로색슨족에게도 아서 왕의 전설이 널리 퍼지게 된다. 그 이유는 노르만 정복 이후 노르만족들이 스스로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영국을 침공한 노르만족들 절반 가까이가 앵글로색슨족들에게 쫒겨나 프랑스 서북쪽에 정착한 이들의 후손인 브르타뉴계 용병들이기도 하였고 브르타뉴인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던 신화를 이용해 앵글로색슨들의 저항 때문에 통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노르만족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브리타니아의 후손이고 침략자들에게 드디어 고토를 수복했다는 식으로 선전할 수 있었다. 물론 본토 웨일스와 수백년간의 단절되었기에 잉글랜드에서는 프랑스 식으로 크게 변형되어버린 아서왕의 전설이 퍼졌고 현대에 내려져오는 아서왕 신화는 여기서 유래한 게 대부분이다.역사상 아서 왕 혹은 그 모델이 되는 인물이 정말로 존재했는지도 분명하지 않으며, 단순히 전설일 뿐이라며 역사상의 아서 왕 및 그 모델의 존재를 부인하는 역사가들도 많다. 그렇지만 직ㆍ간접적으로 아서왕과 관련되어 있는 역사적 기록들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역사상의 인물을 아서 왕에 대응시키려는 이런저런 노력은 계속 있어왔다.
완전한 허구의 인물이라는 주장
역사상의 아서 왕의 실체에 대한 설명 중에 유명한 것은 아서 왕 전설이 브리타니아에 파견된 사르마티아 중기병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중기병 자체가 '기사'의 이미지를 연상시킬 뿐 아니라 그들이 펜드래곤과 비슷한 용의 문양을 사용했다는 점, 땅에 칼을 꽂아놓는 관습이 있다는 점 등이 근거가 된다. 또한 사르마트족의 전설에는 영웅이 죽게 되자 그의 검을 바다에 던지는 이야기나, 아서 왕의 '호수의 여인'을 연상시키는 '물의 여인'도 나온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사르마트족과 관련시킬 만한 전설은 초기 기록이 아닌 후대의 기록에 주로 나오며, 켈트의 전설에 비슷한 내용이 많이 있으므로 굳이 사르마트와 관련시킬 필요가 없다는 반론이 있다.
그와 관련된 다른 유명한 설로는 '아서 왕 = 로마의 군인 아르토리우스'설로, 루키우스 아르토리우스 카스투스(Lucius Artorius Castus)가 5,500명의 사르마트 기병을 이끌고 브리타니아 북부의 '하드리아누스의 성벽'을 수비한 것이 아서 왕 이야기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름의 유사성과 함께 그의 깃발이 펜드래곤이라는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되었다. 반론으로는 그는 로마 제국이 아직 강성하던 시기의 인물이라 시기가 맞지 않는다는 점, 그가 전설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그다지 눈에 띄는 활동을 한 적이 없다는 점, 그가 사르마트 기병을 지휘했다는 뚜렷한 증거도 없다는 점 등이 있다. 1970년대에는 정설로 취급받았으나, 이젠 좀 아니다 싶다는 분위기.
2004년의 미국영화 "킹 아더"는 아서가 브리튼에 주둔했던 로마군의 보조병(사르마티아 중기병) 출신일 것이라는 설과, 로마인 아르토리우스라는 설을 조합하여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이전의 아서왕 영화와는 달리, 아서가 침략자 앵글로색슨족에 맞서서 브리튼인 기독교도들을 지킨 영웅이라는 것을 부각시켰으며, 아서의 적들은 앵글로색슨족임을 명시하고 있다. 색슨족 추장 체르디치(스텔란 스카스가드) 및 그 아들 신릭(틸 슈바이거)을 맡은 배우들도 고증을 위해서 스웨덴인 및 독일인 배우가 나오며 초반에는 게르만어 대사를 쓴다.
또 다른 학설로는 로마의 기록에 '브리튼의 왕(REX BRITANNICA, a king of Britons)'으로 등장하는 리오타무스가 있다. 리오타무스라는 말은 브리튼어로 위대한 왕을 의미하므로 본명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 리오타무스는 로마의 요청으로 무려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왔는데, 이는 이 시대에 브리튼의 분쟁에서 동원되는 병력을 크게 상회하는 것이다. 리오타무스는 색슨족과 맞서싸우는 입장에서 본토에서의 증원을 막기 위해서 로마와 협력하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리오타무스는 로마 관리의 배신 때문에 로마군과 합류하지 못하고 부르군드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했는데, 패배 후 리오타무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브리타니아 열왕사>에서만 리오타무스가 퇴각한 방향에 아발론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었다고 나오는데 이건 유사역사서다. 이 학설에 대한 반론은 별다른 내용이 없고, 기껏해야 아서는 로마와 협력한 것이 아니라 로마군을 무찔렀다는 전설이 남아있다는 점 정도이다. 그 이유는 이 시대의 기록이 부족해서 연구 자체가 어렵고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는 점 때문이다. 이는 이 주장의 약점이기도 한데, 리오타무스는 명백하게 역사적으로 존재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아서보다도 알려진 바가 적은 인물인 것이다. 아서 왕과의 관련 여부는 둘째치고 우선 리오타무스가 누구인지부터 연구해야 할 판이다.
그 외에도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가 아서 왕의 모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색슨족을 물리친 바돈 전투를 중심으로 아서의 존재를 탐구하던 중에 나온 견해이다. 바돈 전투는 벌어진 정확한 시기도, 바돈이 어디인지도, 그리고 싸운 것이 브리튼 인들인지 로마군인지조차 불분명하지만 최소한 색슨족이 바돈에서의 패배로 활동이 수십년동안 위축된 점은 많은 역사학자들이 사실인 듯하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길다스에 따르면 색슨족 부대는 브리튼으로 너무 깊이 들어왔다가 함정에 빠져 바돈에서 포위 섬멸되었다고 한다. 길다스는 바돈 전투의 지휘관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지만, 길다스의 다른 기록을 보면 이 당시의 군 지휘관은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인 듯하다. 그런데 몬모스의 고드프리는 이 바돈 전투는 아서 왕이 지휘했다고 적었으므로,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가 곧 아서 왕이라는 것. 문제는 그 고드프리의 기록은 신뢰성이 상당히 떨어지며, 고드프리는 아우렐리아누스가 아서 왕의 큰아버지(즉 우서 펜드래곤의 형)라고 적어놨다는 점이다. 길다스의 기록을 검토한 학자들 중에도 아우렐리아누스가 활동한 것은 바돈 전투보다 앞선 시대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또다른 문제는, 사실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우스는 길다스의 기록 이외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정체 역시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로마의 기록에서는 그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다. 이 가설을 따른 작품이 ABE 전집에 포함된 영국 역사소설 '횃불을 들고'인데 이 작품에서는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와 그의 조카이자 기병대장인 새끼곰 '알토스' 두 사람이 아서 왕의 모델로 나온다. (해당 소설은 시공사에서 '횃불을 든 사람들'로 재발간되었다.)
이 외에도 잉글랜드 북부의 브리튼 왕국의 왕이었던 우리엔 레게드(Urien Rheged)나 전설적인 북부 브리튼의 왕 코엘 헨(Coel Hen) 등 여러 설이 있지만 너무 많다.
그중 역시 거인 2명을 죽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한 명은 콜랑이라는 이름의 키가 5m이고 거대한 말을 탄 거인기사로 나온다. 최후는 목이 잘렸는데... 목이 그대로 몸에 있고 대롱대롱 매달린 채... 쉽게 말해 끔살이다. 또 한 명은 산 미카엘 성에 사는 식인 거인이다. 이때 엑스칼리버로 거인을 베어 죽이고 거인의 보물을 백성에게 나눠줬다.
아서 왕 전설의 시기와 영국 역사를 쭉 비교해 봤을 때, 실재했다면 여러 정황상으로 로마 지배시기가 끝나가던 때(5세기 후반~6세기 전반)가 가장 적절하며 그 시절에 실제로 영국을 통치했을 만한 강력한 군사지휘관의 증거가 여럿 나오고 있다.
그로 인해 그의 정체가 사실 로마군에 복무한 퇴역 군인이며, 로마의 지배력이 약해지자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앵글로색슨족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혹은 그 과정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가설이 강하게 힘을 얻고 있다. 아서 왕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인 넨니우스(Nennius)의 기록에서는 그를 '왕'이 아닌 군 사령관(dux bellorum)으로 부르며, '브리튼의 왕들 편에서 싸웠다'고 서술하므로 본인은 왕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엑스칼리버 전설의 경우 금속 제련 기술의 발달로 인해 품질 좋은 금속검을 대량으로 보유했던 것을 비유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그가 사망했을 때 호수로 유해를 보냈다는 전설의 경우, 북유럽에서 죽은 이들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비유하는 이야기가 많아 같은 맥락으로 취급했다. 또한, 그 가설을 따르며 진상을 추적해 나가던 다큐멘터리에서는 여러 기록들을 조사해 가다가 마침내 아서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하기도 했다.
사실 신화의 대부분의 내용은 영국에 돌던 전설의 모음집적 성격이 짙다.
여하간, 주류 학계에서는 이제 아서 왕이 정확히 어떤 인물을 모델로 했는지 가려내는 일은 반쯤 접은 상태다. 위에서 설명한 인물들도 죄다 물증이 없는 추측에 싸인 가설일 뿐이다. 참고로 아서 왕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당대가 아닌 9, 10세기 윤색된 역사서로서 존재하는 연대기에는 그저 무슨 무슨 전투에서만 싸웠다는 기록만 있다.
다만 당시 시대를 생각하면 어떠한 가설을 따라도 지금의 상상화처럼 철갑옷을 두른 이미지는 절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갈리아 전기에 나오는 켈트족처럼 벗고 싸웠을 가능성도 없다. 아서 왕은 로마화된 켈트족, 즉 브리튼인들의 장수에, 로마군 출신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갈리아 전기가 쓰여질 무렵과 아서 왕이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 사이의 시간차, 골 지방과 영국의 기후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당대의 무장 상황을 고려한다면 로마군의 제식 갑옷인 로리카 하마타(체인메일)로 무장 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나마도 부하들을 다 입히지는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아서의 포지션에 해당할 인물"들이 위와 같이 여러 명 거론되지만, 그들 중 확실한 물증이 있는 인물은 하나도 없다. 아서의 실존성을 주장하는 주요 전거는 『브리튼인의 역사』(9세기)와 『캄브리아 연대기』(10세기)다. 『브리튼인의 역사』에 바돈산 전투, 『캄브리아 연대기』에 바돈산 전투와 캄란 전투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리튼인의 역사』는 『브리타니아 열왕사』의 초기 버전 같은 것으로, 옛날에는 무비판적으로 신뢰받았지만 현재는 좋게 봐줘야 삼국유사 수준이지 사료로서 가치가 영 좋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는 문헌이다. 『캄브리아 연대기』는 아서왕에 대한 기록이 지나치게 자세해서 문제가 되는데, 도저히 6세기의 인물의 행적을 이렇게 많이 기록하기 위해 필요한 선행문헌(인용, 전거의 대상)이 『브리튼인의 역사』 외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즉 『캄브리아 연대기』의 상세한 아서왕의 행적은 『캄브리아 연대기』에서 처음 창조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후로마 브리튼(sub-Roman Britain) 시대를 논할 때 역사학자들은 아서왕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최대한 우호적으로 말해줘봤자 “그런 역할을 한 사람이 있었을 수 있지만 그런 사람 자체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이 해줄 말이 없다”에 그치는 것이다. 이렇게 아서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에 두드러진 조류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아서의 왕국의 강역을 지도에 표시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이보다 더 급진적으로, 아서가 특정인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완전한 허구의 인물에 불과하기에 "아서 후보"조차 존재할 수 없다는 학설도 있다. 『브리튼인의 역사』와 『캄브리아 연대기』에서는 아서를 6세기 사람이라고 기록했는데, 정작 6세기 당대에 쓰인 길다스 사피엔스의 『브리튼의 파괴와 정복』에는 바돈산 전투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아서라는 존재는 전혀 기록된 바 없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도 없다. 8세기 사람 베다 베네라빌리스의 『앵글인의 교회사』에도 없다. 기원후 400년에서 820년 사이에 작성된 필사본들 중 "아서"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래서 아서 완전허구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아서왕"이 역사학자가 진중하고 중요한 연구를 할 시간을 빼앗고 현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주제 자체를 교과서와 역사책으로부터 추방시켜야 한다고 본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학자로는 Nowell Myres, David Dumville 등이 있다.
아서 왕이 실제 역사적 모델과는 무관하게, 완전히 켈트 신화에서 유래한 신화적인 존재라는 설도 있다. 그중에서는 거인 2명을 처치한 영웅이라는 점도 있다. 실제로 아서 왕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켈트 신화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아서 왕을 대부분 중세풍으로 묘사한 것도 완전한 허구의 인물이라는 증거 중 하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만약에 정말로 로만 브리튼 시대의 사람이라면 그 시대의 복장이나 양식같은 관련된 기록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 조차 없어서 처음부터 중세풍으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아서왕 전설의 주요 소재 중 하나인 성배의 원전은 누아다의 황금솥이라는 가설도 존재한다.여담
불가타 연작에 따르면 아서 왕의 전투 함성은 "클라렌스(Clarence)!!"였다고 한다. 여기서 클라렌스는 웨일스의 지역 이름인데, 프랑크의 샤를마뉴 대왕도 실제 지역명인 "몽주아(Munjoie)!"를 전투 함성으로 사용했다는 사실 때문에 프랑스 작가들이 아서 왕 문학을 집필하면서 그걸 따라했다는 것이 현대 연구자들의 해석이다. 하지만 BBC에서 방영된 드라마 멀린에서는 아서 왕과 기사들의 전투 구호가 "Camelot!"이나 "For the love of Camelot!"으로 변경되었다.
아서 왕의 배경으로 비정되는 시대에 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는 열심히 게임하고 있었고 그 도중에 전자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즉위한다. 중국은 남북조시대로 북조의 북위가 한화(漢化) 정책을 수행했고 남조는 양나라가 독자적인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한국은 삼국시대로 그때까지 변방의 후진국이었던 신라가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등 명군들의 잇단 등장으로 급속도로 발전하여 전성기를 맞이한다.
일부 켈트족 연구가들에 의해 아서 왕은 사실 폭군이었다라는 주장이 나왔다.
단, 이 링크의 세계일보 기사 헤드라인은 명백한 오역으로, 원문의 문구는 "genocidal warlord", 즉 번역하자면 인종학살을 저지른 전쟁지도자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아서 왕의 주적은 대륙에서 쳐들어온 앵글로색슨(Anglo-Saxon)족이었으므로 색슨을 증오하는 브리튼인들 입장에서 색슨족을 마구 죽였다고 폭군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 또한 위 기사에서 곰을 죽인다 운운하는데 여기서 사실 곰은 브리튼인 왕권과 용맹의 상징이라고 한다. 게다가 아더라는 이름 자체가 곰의 의미가 있다. 역시 명백한 오역. 더욱 황당한 것은, 이 문제가 오역 때문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저 기사에서 말하는 내용은 아서가 직접 인종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이 아니라 브리튼족의 예언서 등을 보면 브리튼인들이 아서가 돌아오면 색슨족을 쫓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는 내용이다. 즉 '인종학살을 저지른 전쟁지도자'가 아니라 '인종학살에 적합할 것으로 (후세에) 떠받들어진 전쟁지도자'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실제 역사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