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26인의 원수 중 한명인 오귀스트 마르몽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프랑스 제 1제국의 귀족이자 군인, 원수였던 오귀스트 마르몽은 나폴레옹의 배신자이기도 했다는데요.
오귀스트 마르몽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티용수르세인에서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마르몽은 군인다운 모습을 사랑한 나머지 군인이 되고 싶다고 했고, 아버지는 마르몽을 디종으로 데려가고 마르몽은 거기서 수학을 배워 포병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면식을 가지게 되었고 툴롱 공방전에 나폴레옹을 따라 참전했습니다.
나폴레옹과의 관계는 점점 친밀해졌고, 나중에는 나폴레옹의 보좌관이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을 따라 이탈리아 원정과 이집트 원정에도 참여, 그 가운데 남들과는 달리 승리를 거둠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더니 여단장으로 승진, 1799년 이집트에서 발이 묶였을 때 나폴레옹의 수행원으로 프랑스로 돌아왔고, 나폴레옹이 브뤼마르의 18일 쿠데타를 일으키자 그에 동참, 그 후 포병대를 조직해 제 2차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 마렝고 전투때 마르몽이 지휘한 포병대가 승리에 일조했습니다.
1801년 포병대 감찰관이 되었고 1804년 상급장교로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 받으나 나폴레옹이 원수 명단을 만들때 집어넣는 것을 빠뜨려 나폴레옹에게 서운함을 느끼게 됩니다.
1805년 군단을 맡아 울름 전투에서 큰 역할을 담당, 1806년 나폴레옹을 따라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라구사의 포위를 풀어냈고 1808년 라구사 공화국을 엎어버리고 스스로 라구사 공작이 되며 5년간을 달마티아의 행정관으로서 군사, 생정권을 생사, 마르몽의 집권기간 동안 벌였던 커다란 공공 사업들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좋은 이미지로 남아있습니다.
1809년 제 5차 대프랑스 동맹이 프랑스를 향해 공격해오자 나폴레옹은 마르몽을 소환, 원수봉을 주었고 오스트리아 전쟁의 한 부분을 담당시키기 위해 알리리아 영토 전역을 마르몽에게 맡기게 됩니다.
1810년 급히 소환되어 마세나와 함께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 따라가나 살라망카 전투에서 웰링턴군과의 교전 중 오른쪽 팔과 갈비뼈 두개가 나가는 부상을 당하고 베르트랑 클로셀에게 지휘권을 넘기게 됩니다.
마르몽은 프랑스에서 부상치료를 하기위해 물러났고 1813년 4월 나폴레옹이 다시 군단 지휘를 맡기며 뤼첸과 바우첸, 드레스덴의 일련의 전투에 참가합니다.
1814년 대규모 방위 전역에서 파리 방어전에 참가, 결국 이기기 어렵다 판단하고 나폴레옹을 배신, 이러한 배신으로 마르몽은 나폴레옹에게 죽을때까지 비난 당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추방당하고 제 1차 왕정복고로 부르봉 왕조가 다시 들어서자 마르몽은 루이 18세를 섬겨 지위를 잘 보존하다 나폴레옹이 부활하자 마르몽은 루이 18세와 함께 벨기에로 도망갔다가 워털루 전투로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다시 돌아와 귀족사회의 일원이 됩니다.
그 후 근위대 소대장이 되었고 1820년 생 에스프리의 기사 작위를 받았고 생루이의 상급 장교가 되었지만 이후 마르몽은 절대 신뢰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1830년 7월 아직 근위대 소장으로 복무할 때 마르몽은 왕명에 불복하는 어떤 저항세력도 짓밟으라는 명을 받으나 반대, 자신의 위치를 포기할수도 없어 우물쭈물하다 혁명 세력을 분쇄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게 되며 이로 인해 마르몽은 귀족들에게 비난을 받으며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에 의해 체포되었을 당시 앙굴렘 공작은 자네가 그를 배신했던 것처럼 우리도 배신하려 드는가 ? 라고 말합니다.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쫓겨났을 때 마르몽은 샤를 10세를 배신하지 않고 같이 국외망명을 갔으며, 빈에 정착하게 되며 오스트리아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았으며 라이히슈타트 공 나폴레옹 2세의 가정교사도 했으며 말년에 회상록을 출판합니다.
그러나 신용불량자의 신세는 면할수 없었고 1852년 3월 베네치아에서 사망,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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