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갑이라는게 고대사회에서 뭐였나요?
안녕하세요.
옛날 고대사회에 있었던 '옥갑'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뭐였나요?
옥갑이 있을 당시의 풍습과 시대배경은 어땟나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성은 자(子)이며, 이름은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는 옥갑(沃甲), 《세본(世本)》에는 개갑(開甲), 갑골문에는 강갑(羌甲)으로 전해진다. 옥갑이라는 이름은 태어난 날의 천간(天干)이 갑일(甲日)이어서 붙여진 것이다. 중국 상(商)나라의 제13대 왕인 조을(祖乙)의 아들이자, 제14대 왕인 조신(祖辛)의 동생이다.
옥갑은 형인 조신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조신에게는 조정(祖丁)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나 동생인 그가 왕위를 계승한 이유는 확인되지 않는다. 옥갑의 재위기간 행적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사기》 ‘은본기’에는 옥갑이 죽자 조신의 아들인 조정이 왕위를 이었으며, 조정이 죽은 뒤에는 다시 옥갑의 아들인 남경(南庚)이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만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태평어람(太平御覽)》에는 옥갑이 25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옥갑 [沃甲]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독감 > 옥으로 만든 갑. 경대를 달리 이르는 말. 중국 한 나라때에 임금의 장례에 쓰던 갖가지 기구를 의미 합니다.
중국 한 (서기 전 206~서기 220년) 나라에서는 한나라 황제의 수의로만 사용할 수 있는 옥갑을 미리 만들어 부여와 가까운 곳에 보관해 두었다가 부여의 왕들이 붕어할 때 마다 수의로 사용할 수 있도록 즉시 상납해야 했다. 라는 내용이 삼국지 또는 후한 서등의 중국 측 기록을 철저히 무시하면서 이러한 역사는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의 한대의 사람들은 옥을 산악의 정수로 여겨 시체의 아홉개의 구명에 옥을 두면 시체를 차갑게 하고 사람의 정기가 빠져 나가지 않아 시체가 부패하지 않고 신체를 보존하여 내세에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옥의로 신체를 모두 감싸는 장례문화를 발달 시켰습니다.
화려함을 자랑하는 옥의 였으나 삼국 시기에 좀비가 악의에 대한 금형을 내리면서 옥의로 장례를 지내는 문화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성은 자이며 이름은 사기 은본기에는 옥갑, 세본에는 개갑, 갑골문에는 강갑으로 전해지며 옥갑이라는 이름은 태어난 날의 천간이 갑일이어서 붙여진 것으로 중국 상나라의 제 13대 왕인 조을의 아들이제 베 14대 왕인 조신의 동생입니다.
옥갑은 형인 조신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데 조신에게는 조정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나 동생인 그가 왕위를 계승한 이유는 확인 되지 않으며 옥갑의 재위기간 행적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사기 은본기에는 옥갑이 죽자 조신의 아들인 조정이 왕위를 이었고 조정이 죽은 뒤 다시 옥갑의 아들 남경이 왕위에 올렸다는 것만 기록되어있으며 태평어람에 옥갑이 25년동안 왕위에 있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의 한대(漢代)의 사람들은 옥(玉)을 산악의 정수(精髓)로 여겨 시체의 아홉 개의 구멍(눈, 코, 입, 생식기 등)에 옥을 두면 시체를 차갑게 하고 사람의 정기가 빠져나가지 않아 시체가 부패하지 않고 신체를 보존하여 내세에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런 믿음이 옥의(玉衣)로 신체를 모두 감싸는 장례 문화를 발달시켰다.
현재도 옥은 비싸지만 당시 가공기술이나 재료운반을 위한 교통의 발달 수준을 고려할 때 옥의를 제작하는 일은 엄청난 비용, 시간, 노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수백 가구의 자산에 달하는 비용, 몇 년에 달하는 제작 시간, 몇 천개의 옥조각(玉片)을 일일이 구멍을 뚫는 노력이 옥의를 제작하는데 필요했는데 실로 국가적인 일이었다. 그렇기에 옥의를 입는 사람은 황족, 왕족, 고위 귀족에 국한되었다. 옥의를 제작하는 관청도 따로 두었는데, 관청에서 공인(工人)들에 의해 재료 선택, 구멍 뚫기, 광택 내기, 옥의 조립 등의 작업이 이루어졌다.
옥의의 형상은 사람의 형상과 거의 같으며 옥의는 머리 덮개, 상의, 소매, 장갑, 바지, 신발이란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모두 옥을 조립하여 만들었다.
머리 덮개의 경우 옥으로 눈을 가리고 코와 귀는 막았다. 얼굴을 구성하는 옥은 직사각형의 작은 옥조각이었지만 눈이나 코의 경우에는 크기가 좀 더 컸다. 입 안에는 옥을 물렸다.
상의는 앞, 뒤, 옆으로 모두 분리되었다. 앞부분은 가슴 부분이 넓었고 복부는 튀어나왔다. 뒤는 둔부에 해당하는 부분이 넓었다. 장갑에 해당하는 손부분은 반원형의 옥을 쥐어진 상태로 제작되었다. 바지의 경우 생식기와 항문 부분을 옥으로 막았다.
옥조각의 조립은 각각의 옥조각에 구멍을 뚫어 금으로 된 실이나, 혹은 은이나 동으로 된 실을 사용하여 연결함으로써 옥의를 만들었다.
옥의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하북성 만청(河北省满城)에서 발굴된 중산정왕 유승(中山靖王 劉勝, 삼국연의의 유비가 자신의 선조라고 주장하는 그 인물이다.)과 유승의 아내 두관(竇綰)의 옥의로 유승의 옥의는 옥조각이 2498개, 금실 1100개로 제작되었고 처 두관은 옥조각 2160개 금실 700개로 제작되었다. 금실로 제작되었다 하여 금루옥의(金縷玉衣)라고 한다.
실로 화려함을 자랑하는 옥의였으나 삼국 시기에 조비가 옥의에 대한 금령을 내리면서 옥의로 장례를 지내는 문화는 사라지게 되었다.
옥의를 입고 죽은 사람들은 시체가 보존되기를 바라고 불사 혹은 내세를 꿈꾸었지만 정작 옥의를 입은 묘를 발굴해보니 유해는 미라조차 되지 못하고 모두 흙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출처] 한나라 때 부여에서는 부여왕의 장례에 옥갑玉匣을 사용하였다.|작성자 시안바시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혼의 불멸을 믿고 장례를 후하게 한 것은 고대사회의 공통된 풍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여 일반적으로 후장을 하였습니다. 부여에서는 보통 송장을 멈추어 두는 기간이 5개월에 미칠 정도로 상주는 장사를 속히 지내려 하지 않고 남의 강권에 의해 행하는 것을 예절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여름에는 얼음을 써서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고자 하였고 또한 많은 부장을 하였습니다. 나아가 귀인에 대한 순장의 풍습은 한·위시대까지도 행하여져 많은 때에는 그 수가 백에 달했다고 합니다. 장례를 치를 때에는 남녀 모두가 순백색의 의복을 입고, 특히 부인은 패물이나 고리는 차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 등은 귀족계급에게 있어 조선숭배사상이 극히 엄격하고 상당히 복잡하였던 것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특히 왕장은 옥갑을 사용했고 옥으로 만든 옷을 입혔다고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옥갑(沃甲)은 상나라의 16대 군주이다. 태어날 때의 이름은 자유(子逾)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형인 조신에 이어 상나라의 15대 군주가 되었다. 임인(壬寅)년에 즉위하였고 비(庇)를 수도로 삼았다. 재위 25년(죽서기년에는 20년)만에 사망하였다. 옥갑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조카인 조정이 뒤를 이었다.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에 따르면 상나라의 14대 군주였고 강갑(羌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출처:위키백과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옥갑"이라는 말은 고대 한국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며, 그 의미는 아주 광범위합니다. 일반적으로 "옥갑"은 고위직이나 귀족 사이에서 권력이나 지위를 상징하는 물건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옥갑"이라는 말은 보통 "옥(玉)"이라는 귀중한 보석과 "갑(甲)"이라는 방어구를 결합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옥갑"은 귀중한 물건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고대 한국사에서 "옥갑"이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사례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옥갑계'입니다. 이는 고구려에서 신라로 이민온 김해김씨 성장의 조상인 김수로왕이, 신라의 세조 양원군(모덕왕)의 딸인 허황옥을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 양원군에게 보낸 선물로, 허황옥과 함께 보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옥갑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와 같은 고대 한국의 국가에서 귀족 사이에서 교환되었으며, 귀족의 지위와 권력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이러한 귀중한 물건을 주고받는 행위는 귀족 사이에서의 연합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옥갑이 사용되던 시대는 한반도의 삼국시대로, 이 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 세 국가가 한반도를 지배하던 시기입니다. 이 세 국가는 서로 경쟁하면서도 때때로 연합을 이루며 각자의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옥갑"과 같은 귀중한 선물은 국가간의 관계를 유지하고, 혹은 개선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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