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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11

조선시대의 한명회는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인가요?

과거 대하사극에 많이 등장했던 인물이더라구요. 그만큼 당시 정치사에 큰 비중을 차지했던것 같은데 종합적으로 훌륭한 인물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양면성이 있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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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리함
    누리함23.08.11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정치가.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鴨鷗亭)ㆍ사우당(四友堂). 시호는 충성(忠成). 본관은 청주(淸州). 한상질(韓尙質)의 손자. 장순왕후(章順王后 : 성종비 成宗妃)ㆍ공혜왕후(恭惠王后 : 성종비 成宗妃)의 아버지. 1452년(문종 2) 음보(蔭補)로 경덕궁직(敬德宮直)이 되고 친구인 교리(校理) 권남(權擥)의 주선으로 수양 대군(首陽大君)에게 가담하여 무사(武士) 홍달손(洪達孫) 등 30여 명을 추천, 그의 심복을 삼게 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수양 대군을 도와 군기녹사(軍器錄事)가 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사복시 소윤(司僕寺少尹)에 올랐다.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승진, 이해 가을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으로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이듬해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의 단종(端宗) 복위 운동을 좌절시키는 데 중요 역할을 담당하고 그들의 주살(誅殺)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도승지(都承旨)에 승진, 1457년 이조 판서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고, 이어 병조 판서가 되었다. 1459년 황해(黄海)ㆍ평안(平安)ㆍ함길(咸吉)ㆍ강원(江原) 4도의 체찰사(體察使)를 지낸 후에 1461년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고, 이듬해 우의정에 이어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이 되어 병으로 한때 사임, 다음해 신숙주(申叔舟) 등과 앞서 편찬(編纂)에 착수했던 《신제대전(新制大典)》의 초안을 완성했다.


    이해 이시애(李施愛)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신숙주와 함께 반역(反逆)을 꾀했다는 소문이 돌아 피체, 신문을 당했으나 혐의가 없어 석방되고, 1468년 세조가 죽자 세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원상(院相)으로서 서정(庶政)을 결재했다. 이해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올랐고, 1469년(예종 1) 영의정에 복직, 이 해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 판서를 겸임했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록되고 이해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로서 최항(崔恒)ㆍ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世祖實錄)》을 완성, 1484년 70세로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다. 세조의 총신으로 왕을 보필하여 조선 초기 문화의 발전에 많은 공을 세웠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윤비(尹妃) 폐사(廢死)에 관련했다 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되었다가 뒤에 신원(伸寃) 되었다.

    출처 : 인명사전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실록의 사관은 도량이 크고 성격이 활달했으며 결단력이 뛰어났다고 평합니다. 그만큼 열정과 능력은 지략가로서 대단히 출중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대표적 업적으로 오가작통법과 면리제가 있는데 세조 대에 오가작통법을 만들면서 면리제를 실시, 오가작통법은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면이제는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사라지지않고 일제강점기와 현대 남한과 북한의 행정제도로 사용됩니다. 다만 그 능력을 악용해 치부에 힘써 많은 재산을 모으로 비정상적인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즉, 수완은 뛰어지만 위대한 인물로 보기는 힘듭니다.

    무엇보다 명분이 없는 계유정난의 실질적 설계자였다는 것으로 해당 사건을 비판하는 이들에게는 역적 취급을 받습니다.

    공신을 4번 수여받았지만 모두 부정적으로 볼만한 소지가 있는 공신으로 정난공신과 좌익공신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가담해 받은것으로 역적으로 보고 익대공신은 후대에 비운의 인물로 숭상받는 남이의 옥에 참여해 받은 것이라 간신 취급받기 좋으며 자ㅗ리공신은 성종을 잘 보필했다는 객관적 기준이 없는 사유로 수여한 공신입니다.

    단종과 관련해 수많은 사람들을 난언죄등으로 참소, 이들은 단종에 대한 충을 지키기 위한 것때문에 첨소된 것이라 명분이 전무한 정적 공격일 뿐, 결국 숙종 때 정몽주의 후손들이 신원되고 정조도 정몽주 후손의 절의에 대해 살아있는 사육신이라 인정했습니다.

    또 음서로 관직에 진출해 이에 관련해서도 부정적인 인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엄청난 출세가 가능했던건 조상의 덕 보다 계유정난과 단종의 폐위 같은 비정상적인 사건들을 설계해 진두지휘한 핵심있는 인물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기의 권신이자 외척이며 정치가다. 수양대군으로부터 "나의 장량이로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조선 초기 세조 ㅡ 성종 시대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호는 그 유명한 압구정입니다


    한명회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오가작통법과 면리제가 있는데 세조 대에 오가작통법을 만들면서 면리제를 실시했고 오가작통법은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면리제는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일제강점기와 현대 남한과 북한의 행정 제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능력을 악용해 치부에 힘써 많은 재산을 모으고 비정상적인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수완은 뛰어나지만 위대한 인물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무엇보다 명분이 없는 계유정난의 실질적 설계자였다는 것 때문에 해당 사건을 비판하는 이들에게는 역적 취급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