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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철한불독44
냉철한불독4424.01.23

임진왜란 당시 용인전투에서 8만명의 병사가 1600명의 일본군에 패배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임진왜란 당시 최악의 전투라고 하는 용인전투에서 조선군 8만명의 병사가 1600명의 일본군에 패배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 많은 대군이 육지에서 전투를 했음에도 승리하지 못한 이유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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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8만명의 조선군 병력 중 상당수는 징집된 농민들이었고, 훈련과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반면에 일본군은 전문적인 무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조선군보다 뛰어난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용인전투 당시 조선군은 일본군의 침략을 예상하지 못하고,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조선군은 일본군의 조총을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무기와 전술을 갖추지 못했고, 군사 지휘도 미숙했습니다. 용인전투 당시 조선군은 일본군의 조총에 대한 공포와,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사기 저하가 조선군의 패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활이랑 말이 빠르더라도 조총으로 총 무장한 군사를 당해내기 어렵고 특히 평지에서는 총에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용인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1592년 7월 13일 경기도 용인에서 이광과 윤선각이 이끄는 전라도 이광 4만 전라도방어사 곽영 2만+충청도 윤선각 각 1만 5천으로 7-8만명의 남도근왕군이 겨우 1600명의 왜군에게 크게 패한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한국사 5대 패전(칠전량해전 쌍령전투 현리전투 주필산전투) 중 하나입니다. 이는 전략과 전술없이 적의 숫자가 적다고 얕잡아 보고 섣부른 행동을 한 이광 등의 무능력이 낳은 참사입니다. 훗날 권율은 황진과 함께 와신상담하여 행주대첩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