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과거 시험의 점수는 어떻게 평가되었나요?
조선시대 과거 시험은 객관식이 아니라 주관식(논술형식)으로 알고있는데요.
시험에서 점수나 평가는 어떤 과정으로 매겨졌나요?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에서는 과거를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법제적인 장치를 마련하였다. 문과나 생원진사시는 글을 짓는 제술시험이기 때문에 공정한 평가가 관건이었다. 응시자의 익명성을 보증하기 위해서 봉미·할봉·역서 등이 도입되었다.
봉미는 답안지 오른쪽 끝에 응시자의 인적 사항(이름, 나이, 거주지, 본관, 아버지·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외할아버지의 이름과 관직)을 적은 피봉을 접어서 풀로 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채점 담당관이 피봉을 몰래 열어볼 수 있기 때문에, 봉미된 피봉 부분을 잘라내어 채점이 끝날 때까지 따로 보관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할봉이라고 하였다. 할봉을 할 경우에는 피봉과 답안이 혼동되지 않도록 답안과 피봉에 같은 번호를 적어 두었다.또한 채점하는 시관이 필체나 답안지의 질 혹은 답안지 내의 표식 등으로 응시자를 알아보지 못하게 답안을 서리들에게 모두 베껴 쓰게 하였다. 시관의 채점은 사본을 활용하게 하여서 시관과 응시자의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부정행위를 차단하였다. 이처럼 답안의 사본을 만드는 것을 역서라고 한다.
과거의 공정성을 유지하려고 한 것은 응시자의 출신이나 배경으로 관료를 선발하지 않고 개인의 능력에 바탕을 두고 관료를 선발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된 것이 있었다.
조선은 유학 사상을 정치 이념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유학 사상을 매우 중요한 도덕적 가치로 삼았다. 그러나 시험만으로는 응시자가 유학적 소양이 갖추어져 있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문제가 실학자의 과거 개혁론에서 항상 거론되었다. 실학자들은 응시자의 도덕적 인성을 검증하고, 게다가 공정하게 관료를 선발할 수 있는 방법을 언급하였다. 그러려면 관료 선발 방식을 바꾸는 것이 최선이지만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 다음 차선책은 시험 방식을 시부(詩賦)나 표전(表箋)이 아니라 경의(經義)와 시무책으로 시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출처 :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9779&cid=59020&categoryId=59031
위와 같이 과거 시험에 공정함을 기하도록 하였으나 부정부패로 얼룩지기도 했습니다.
과거의 합격자는 시관(시험관리자들)들을 두어서 합격자를 가리고 했는데, 시관들을 매수하여 합격하도록 하기도 하는등 여러가지 문제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합니다.
조선시대에도 지금과 비슷하게 과거가 인생의 중요한 관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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