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성계 즉위는 정당성이 부족했는데, 공양왕이 직접 선위를 했다면 이성계가 왕이 되는데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공양왕의 선위도 아닌 왕대비 안씨가 내린 교지로 왕이 되고 무력으로 왕을 끌어내린 반정도 아니었으므로 정당성에 애매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성계 즉위에 명분이 부족했고, 이는 고려 왕족들이 모반을 일으킬수있는 명분이었으므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조선을 유지하는데 있어 방해물이 되는 왕씨들을 모조리 숙청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청을 이성계는 묵살해왔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왕씨들이 몰살당하게 됩니다.
피의 숙청에 대한 불길은 박위라는 사람에게서 시작됩니다.
조선이 건국되고 3년 후 , 박위는 김가행과 박중질이라는 사람을 시켜 점쟁이를 찾아가 공양왕을 비롯한 고려의 왕족인 왕씨의 운을 물어보고 이성계와 비교해 운이 누가 나은지 등의 점을 보라 시키는데, 이러한 것이 발각되며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의 행위를 역모로 간주, 고려 왕족들을 강화도, 거제도로 강제 이주 시킵니다.
그러나 몇 왕씨들이 모반을 꾀한다는 제보가 정도전, 이방원등을 통해 계속 들어오자 신하들은 왕씨들을 제거해야 한다며 이성계에게 지속적으로 주청, 결국 이성계도 그들을 제거하기로 합니다.
태조 3년 1394년 4월 15일 윤방경 등은 강화도에 있던 학성부원군 왕향 등 16명을 강화 나루에서 물에 빠트려 죽입니다.
2일 뒤 4월 17일 공양왕과 폐세자 왕석이 삼척에서 죽고 공양왕의 다른 아들도 이때 살해되고 20일 거제도에서 수연군 왕규 등 왕씨일족 110여명을 바다에 던지며, 왕씨의 남은 자손들을 대대적으로 색축하기 시작해 많은 왕씨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그 외에 남아있던 왕씨들은 외가의 성을 따르게 하고 사성정책으로 개성 왕씨가 된 사람들은 원래 성씨로 되돌리면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습니다.
살아남은 왕씨 일족은 왕 이라는 한자를 변형시켜 옥, 신, 전, 김 , 마 씨 등으로 성을 바꿔 왕씨가 아닌척 숨어 살았습니다.
이는 야사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이고, 실록에서는 이성계가 왕씨들을 죽이는 것을 반대했으나 신하들이 이성계 몰래 왕씨들을 죽였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