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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내일도모레도24.02.23

인조가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이유가 있나요?

왕위계승서열에서 적장자가 죽으면 적장손이 계승하는것이 원칙이었지만 인조가 이를 요구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차남이었던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이유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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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 이후 1645년(인조23) 형인 소현세자가 그해 4월 갑자기 죽자 5월에 귀국합니다. 세자를 다시 책봉을 해야 하는데, 당시 대부분의 신하들은 소현세자의 아들 세손(숭선군)이 있었지만 인조가 국유장군론(國有長君論)을 내세워 세자로 책봉되게 됩니다. 우선 숭선군의 어린 나이가 문제였으며, 인조와 봉림대군이 청에 대한 복수 감정이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봉림대군은 처음에는 사양하였으나 결국 세자로 책봉되어 1649년 조선 17대 국왕 효종으로 즉위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조는 청 황제인 옹정제 앞에서 굴욕(삼배고구도)을 당하고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 부부 그리고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은 볼모로 청나라로 잡혀갔습니다. 이후 인조는 소현세자가 아버지가 굴욕 당한 수치스러움 해소를 위해 반청운동에 앞장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청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고 청황실과 가까이 지내는 모습에서 왕의 자리까지 넘본다고 의심하였습니다. 소현세자는 귀국 후 병사하였고 세자빈도 출궁한 뒤 사사되었습니다. 세손들도 제주도로 유배 당하였습니다.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이 즉위를 하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미 인조에게는 소현 세자가 더이상 세자가 될수 없다고 생각 했습니다.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운 뒤 인조는 소현세자 일가가 봉림대군에게 걸림돌이 될 거라 스스로 단정짓고 소현세자 일가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린 원손은 뚜렷한 책(꼬투리)을 잡을 수가 없었 던 것도 사실 입니다.


  • 안녕하세요. 염민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비록 죽은 소현세자의 큰아들을 세손으로 삼기를 청한 신하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지만

    인조는 봉림대군의 뛰어난 능력을 높이사 형의 뒤를 이어가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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