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들어올때는 사찰이 사람과 가까이 있었다는데 산속으로 들어간 이유가 뭔가요?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들어올때는 사람들과 가까이에서 더불어 살아갔다고 하던데 지금은 사찰과 모든절들이 산속으로 들어가 있더군요. 어떤이유로 사찰이 산속지어졌나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불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는 사람들과 가까이에서 더불어 살아갔다고 합니다. 지금은 대부분 산속에 위치해 있습니다.
아마도 처음의 불교는 고려시대까지 나라의 국교의 역할에 가까우면서 백성들과 가까이 교리를 전파하고 왕권강화를 위한 도구로 긴밀한 협력 관계였다고 한다면 이후 왕권과 불교계 관리들의 부패가 심해지면서 불교의 성격이 교종에서 선종으로 바뀌면서 교리를 공부하고 퍼트리기보다는 개인의 참선과 수행을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조선사회에 들어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사상이 강화되면서 불교는 점점 산과 같은 자연 환경에서 명상하고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또한 중앙집권적 교리에서 선택받지 못한 이유로 사찰이 인적이 뜸한 산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현대에 들어 교통이 발달하게 되면서 산속에 지어진 사찰들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지고 오히려 아름다운 자연경관속 사찰로 좋은 풍경을 누릴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불교가 융성한 시기에 사찰이 도심과 산속 모두있어 도심 가까운 곳은 주로 왕과 귀족이 다니며 산속 사찰은 가끔 여행가듯 다녔는데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시대가 오며 숭유억불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도시의 절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산지형 사찰이 가장 보편적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우선 탈속주의와 풍수지리설의 영향 때문이다. 앞서 밝혔듯 산악신앙이 유행하기에 알맞은 지리적 조건이다. 국토의 시원지를 백두산으로 삼았고 조상들은 산신이 나라를 지켜준다는 믿음이 강했다. 곤란에 처하거나 가뭄이 들면 산신에게 운명을 맡겼다. 금강산의 봉우리들이 불보살의 이름으로 장식된 사실에서도 산악신앙의 강렬함을 엿볼 수 있다.
세속권력과의 거리를 두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신라 말 선승의 결집을 이룬 구산선문은 말 그대로 산문(山門)이다. 수도였던 경주와 일정하게 떨어져 제도권의 귀족적 불교에 저항했다. 수행과 청빈으로 일관한 삶으로 민중의 호평을 받았다.
-출처: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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