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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이라이763
프로파이라이76323.08.28

시묘살이라는 풍습의 기원이 궁금합니다

과거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3년의 기간동안 부모님 묘 앞에서 지키고 생활을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요. 이 시묘살이라는게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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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2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시묘살이는 3년이라는 기간은 혼자 먹고 활동할 수 없는 유아기 동안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기간입니다. 시묘살이는 효를 중시하던 유교 사회에서 널리 이루어졌다고합니다. 자식은 산소를 돌보고 좋은 먹을거리를 대접하며 돌아가신 어버이를 모셨습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시던 때와 똑같이 아침 저녁으로 문안 드리고, '공양'이라고 부르는 간단한 상차림도 했다고합니다. 또한 부모님의 죽음이 자신의 불효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여 3년 동안 수염과 머리카락도 깎지 않았다고하며 이는 당시의 예절이자, 자식으로서 해야 할 도리였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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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시묘리라는 지명은 효자가 부모의 묘 앞에서 시묘 살이를 했다는 데에서 유래한다고 하는데 시묘라는 것은 말 그대로 묘를 지킨다는 뜻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정성껏 장례를 치르고 효심이 깊은 자식은 부모님의 묘를 지키게 되는데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흔히 조선 시대 부터 라고 알고 있는 시묘 살이의 유래는 사실 이른 시기부터 유교의례를 수용했기에 이미 삼국 시대 부터 삼년상을 행했음을 중국 측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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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시묘살이(祠廟祭儀)는 주로 가문이나 조상을 위해 집안 안에 있는 시묘(祠廟)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시묘는 조상들의 영혼이 머물고 있을 수 있는 공간으로, 일반적으로 이 곳에서 정기적으로 제사가 지내집니다. 시묘살이는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제사를 지내고 가족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의식입니다.

    ​시묘살이는 중국의 고대 제사 의식으로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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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공자가 사말하자 그의 제자들이 3년간 심상을 지내고 돌아갔는데 제자 중에서 자공은 6년동안 공자의 묘 곁에서 여막을 짓고 추모했다고 전해지며, 우리나라는 고려 의종대에 손응시, 명종대에 장광부, 고려 말기 하광신, 김광재, 하윤원 등 3년의 여묘 생활을 했습니다.

    즉, 이른 시기부터 유교의례를 수용했기 때문에 이미 삼국시대부터 삼년상을 행했음을 중국의 기록으로 알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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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실록에 의하면 은진(恩津) 사람 이형지(李亨之)는 1417년에 아버지가 큰 병으로 죽음을 넘나드는 동안 아버지의 설사 변을 직접 맛을 보아 병세가 어떤지 알아보았으며 결국 돌아가시자 3년간 묘 앞에 여막을 짓고 살았다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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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공자孔子가 사망하자, 그의 제자들이 3년간 심상心喪을 지내고 돌아갔는데, 제자 중에서 자공子貢은 6년 동안이나 공자의 묘 곁에서 여막을 짓고 추모하였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의종대에 손응시孫應時, 명종대에 장광부張光富, 고려 말기에 하광신河光臣 김광재金光載, 하윤원河允源 등이 3년의 여묘廬墓 생활을 하였다. 또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의하면 최누백崔累伯은 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를 잡아서 복수하고 3년 동안 여묘에서 살았다. 경주에 살던 손시양孫時揚은 부모를 위해 각각 3년간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살았으므로, 국가에서 그에게 정문旌門을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성리학의 대가인 정몽주鄭夢周는 부모의 상에 각각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후 조선시대가 되자 시묘살이는 사대부에게 널리 유행하였다.

    시묘살이는 유학의 유행과 함께 널리 실행되었다. 유학은 효를 지상으로 하는 이념이므로, 유학자는 돌아가신 부모를 3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모셔야만 했다. 그 때문에, 시묘살이 중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는 경우가 많으며 심하면 생명을 잃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시묘살이는 유가의 보편적인 예서인 『가례家禮』 등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 시묘살이가 사대부가에 유행하게 된 것은 옛날 공자의 제자들이 스승을 위해서 한 일이 중국에서 계승되었고, 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사대부가의 풍속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시묘살이는 의례의 실천이라기보다는 전통적인 유교적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시묘살이는 『가례』에 언급되지 않았음은 물론, 국가 의례서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도 없는 규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례편람四禮便覽』의 본문에서는 언급되지 않았고, 다만 ‘반곡反哭’에서 이황李滉의 의견을 소개하는 정도였다.


    이처럼 시묘살이가 예서에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 『가례』에서 규정한 상례의 일정과 어긋나는 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즉, 장례가 끝나면 혼백을 집으로 모셔 와야 하고, 그런 다음에 망자의 신주를 사당에 들이게 된다. 그런데 상주가 묘소 옆에 거주하게 되면 혼백을 모셔오는 ‘반혼返魂’을 삼년상 이후로 미루어야 해서 예서의 일정과 어긋나게 된다. 예학자의 입장에서는 시묘살이를 명쾌하게 인정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사례편람』의 인용문에 의하면, 퇴계 이황은 시묘살이에 대해서 “지금 여묘의 풍속은 성하고 반혼하는 예는 없어졌으니 한탄스럽다. 다만, 말세에 예법이 무너져 집으로 부모의 혼백을 모셔와 근신하지 못하는 일이 많이 생긴다면, 여묘를 행하여 혼잡을 피하는 것보다 못하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이이李珥는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지금 장례 후에 반혼하는 일이 많은데, 이는 정말 바른 예이다. 다만, 세속 사람들이 잘못 본떠 여묘하는 풍속을 폐하되, 반혼 후에는 각기 제집으로 돌아와 처자와 한데 거처하면서 예법을 크게 무너뜨리니 심히 한심하다. 무릇 어버이 상을 당한 이는 스스로 헤아려보아 일일이 예를 따라 조금이라도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니, 마땅히 예에 따라 반혼하고, 혹시라도 그렇지 못하면 옛 풍속에 따라 여묘살이를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출처 : 한국일생의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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