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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의 말똥구리
땅속의 말똥구리23.06.12

조선시대 천민중에 백정은 왜 포함된걸까요?

조선시대 시장에서 일하는 대부분은 일상 평민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정은 드라마에서도 보았듯이 천민에 속하는데요.

왜 백정이라는 직업이 조선시대에 천민으로 분류됬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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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수시로 살생을 하고 가축의 잘린 목이나 내장등을 만지는 불쾌한 일들이 천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정이라는 직업은 매일 매일 돼지나 닭, 소를 잡아야 하는 직업 이였습니다. 즉, 동물의 피를 매일 봐야 하는 직업이기에 불교나 유교를 생활 기반으로 우리 선조들은 백정을 천한 직업으로 여기게 된 것 입니다. 사회적·관념적으로 차별 대상이었던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신분해방을 위해 형평사 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정()은 고대부터 내려오던 한반도에 있었던 계층에 대한 호칭이다. 현대의 인식으로는 옛날에 소나 돼지 등 동물을 잡고 해체해서 파는 일을 했던 소위 도축업자로서, 조선시대에는 평민 하류에 속해 천민노비보다 사회적 인식이 나빴으며, 조선 전기 중대한 사회문제로 취급받았다. 때문에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백정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당연히 함부로 도축업자 또는 관련 종사자를 이따위 멸칭으로 부르면 매우 큰 실례이니 조심하자[1].

    그러나 정확하게 도축, 발골, 정형을 담당하는 사람이 역사적으로 백정이라고 불린 것은 조선시대 세종 이후의 일이었다. 그전에는 백정은 일반 백성을 의미하는 단어였으며 조선 세종 이후 백정이 다른 뜻으로 바뀐 후에도 도축업자가 백정일 수는 있었지만 모든 백정이 다 도축업자는 아니었다. 또한 백정이 아닌 양인 도축업자도 있었으니 모든 도축업자가 백정도 아니였다.[2] 도축업자는 백정의 일부였으며 백정은 도축업 이외에도 다른 직업군을 포괄하고 있는 다른 의미의 단어였다. 엄밀히 따지면 직업군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혈통 혹은 신분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백정의 어원은 중국 수나라(隋)에서 온 말로 당시 뜻은 그냥 일반 백성을 뜻하였을 뿐이다. 수나라가 전국을 통일하고 세금을 걷어야 하니 국가에서 인구조사를 하였다. 지역에서 군인이나 향리 등의 직역을 부여한 집을 정호(丁戶)라 불렀고,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집을 백정호(白丁戶)라고 불렀다. 백정은 백정호에서 나온말이며, 여기서 백은 하얗다는 의미였다가 다른 한자로 바뀌어서 00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한국인이 알게 된 백정은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 하면 바로 고려시대 화척(禾尺)이라고 불리는 무리였다. 수척(水尺)·양수척·무자리라고 불렸던 이들은 이들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화척으로 불렸다가 조선 초에는 백정(白丁)이라고 바뀌어 불렸다. 이들은 고려시대부터 악명 높은 범죄집단으로 떼지어 유랑하며 걸식, 강도, 방화, 살인 등 각종 범죄를 자행하였다. 고려 말의 홍건적 침입 때에는 길잡이 노릇을 하였으며, 왜구를 가장해 민가를 약탈하기도 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는 나라에서 화척을 비롯해 제주 사람과 재인을 모두 찾아내어 서북면 수졸(戍卒)로 충당하기도 하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싸움도 잘하니 달래고 집과 관직을 주며 정착하게 했지만 천성이 유랑자들이라 쉽지않았다는 문헌이 있다. 소수는 적응하여 살았으나 대부분은 유랑생활을 그리워해 못 버티고 사라졌다고한다.

    조선 태조 이후 성종 때까지 조정은 이들을 호적에 올려 파악하려고 하거나 토지를 지급해 농업을 생업으로 삼도록 하였고, 그러한 자에게는 신공을 면제시켜주는 정책을 계속 펴나갔다. 아울러 독립된 집단생활과 자기들끼리의 혼인을 금지하는 한편, 일반 양인과 함께 살게 하면서 혼인을 장려하였다. 또한, 지방 관아에서 이들을 찾아내 각 방(坊)과 촌(村)별로 보호하게 하고, 장적을 만들어 형조·한성부·감영 및 각 고을에 보관했다가 출생·사망·도망 등의 사항을 기재하도록 하는 등 철저히 점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