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기에 혁명파와 온건개혁파로 양분되었던 사대부 계층은
고려 말기에 혁명파와 온건개혁파로 양분되었던 사대부 계층은 정치적으로 훈구파와 사림파로 갈라지졌는데요. 훗날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뉘어지게 된 커다란 원인이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현대 한국사 연구에서 ‘훈구파’는 세조의 집권과 함께 형성돼 성종 때까지 큰 교체 없이 이어지면서 핵심적 지배층으로 자리잡은 세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들은 거듭 공신에 책봉되고 대신직을 독점하면서 중앙 정
치를 이끌었고, 공적 · 사적 수단을 이용해 거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중요한 제도 정비와 관찬 사업을 주도해 국가가 안정되는데 기여한 실용적 관학파이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훈구파’는 긴밀하고 중첩된 혈연 · 혼인 관계를 형성해 영향력과 지위를 확대하고 재생산함으로써 견고한 특권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처럼 독점적 지위를 차지한 ‘훈구파’는 권력의 편중과 경제적 부패 등의 문제를 점차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런 문제를 본격적으로 비판한 세력은 ‘ 사림파’였다.
사림파는 ‘재지의 중소지주’라는 사회 경제적 배경을 지니고 성종 중반부터 삼사를 거점으로 진출하였다. 사림파는 ‘훈구파’의 권력 독점과 경제적 비리 등을 탄핵함에 따라 두 세력의 갈등은 점차 격화되었다. 그런 충돌이 폭발한 정치적 사건이 연산군 때부터 명종 때까지 발생한 네 차례의 사화였다.
그때마다 ‘사림파’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지만 그런 시련을 극복하고 선조 초반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런 연구는 조선 전기 정치사의 전개를 지배 세력의 교체와 연결해 설명하고, 그런 변화의 배경에는 사회 경제적 기반과 사상적 지향의 차이가 있었음을 파악함으로써 한국사를 논리적이고 발전적으로 이해했다는 중요한 역사학적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충분하게 실증되지 않았거나 부분적으로만 증명된 개념에 입각해 여러 사실을 설명함으로써 실제와 어긋나는 역사상을 조립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주요 쟁점으로는 조선시대 지배층의 가문적 연속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고, ‘재지의 중소지주’라는 사회 경제적 배경을 지나치게 강조했으며, 대신과 삼사의 고유 임무와 관직 체계의 연속성을 간과했다는 문제 등이다. 또한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사림파’의 긍정성을 부각시키면서 기존의 ‘훈구파’와 도덕적 선악 구도로 대비한 것도 다시 검토해야 할 측면으로 지적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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