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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5

고려시대 별무반 조직이 역사적으로 갖는 의의는 무엇인가요?

고려시대 윤관이라는 사람이 고려의 군사 조직을 개편했다고 하는데, 이 때 만들어진 고려시대 별무반 조직이 역사적으로 갖는 의의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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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104년(숙종 9)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으로 여진정벌에 나섰다가 패하고 돌아온 윤관(尹瓘)의 건의에 따라 강력한 기병대의 편제를 갖춘 여진족에 대항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설치동기는 당시 이군육위(二軍六衛)를 기간으로 하는 기존의 군사체제가 붕괴되어 대규모의 군사동원이 불가능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조처라 하겠다.

    조직은 기병과 보병으로 나뉘어 문무산관(文武散官)과 이서(吏胥)로부터 장사꾼과 노복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을 징발대상으로 하였다.

    이들 가운데 말을 가진 자는 기병인 신기군(神騎軍)에 속했고, 말이 없는 자는 보병으로서 신보(神步)·도탕(跳盪)·경궁(梗弓)·정노(精弩)·발화(發火) 등의 군에 편입시켰는데, 나이 스물 이상이면서도 과거응시자가 아니면 모두 신보군에 속하게 하였다.

    그 밖에 승도(僧徒)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이 있었다. 이와 같이 여러 계층에서 동원된 별무반을 서반과 모든 진(鎭)·부(府)의 군인과 함께 4계절 훈련시켜 대규모의 여진정벌 계획을 추진하였다.

    계획이 실천에 옮겨지기 전에 숙종이 승하했으나 그 뒤를 이은 예종도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특히,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곧 동계(東界)를 순시하게 하고 동계가발병마사(東界加發兵馬使)·동계행영병마사(東界行營兵馬使) 등을 두어 동계 방면에 대한 군사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1106년(예종 1) 7월 조정에서 동여진정벌에 대한 의론이 있었는데, 이 때 도병마사는 앞서 동여진과의 싸움에서 패한 것은 군령이 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일찍이 현종 때 거란 침입시에 시행했던 군율을 따를 것을 청해 시행하게 하였다.

    그 해 윤관과 오연총(吳延寵)이 숭인문 밖에서 신기군과 신보군을 사열한 것으로 보아 별무반의 편성이 신속하게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여진정벌의 주력부대가 별무반이었음을 볼 때, 도병마사가 제청한 군령은 바로 별무반을 중심으로 한 군율이라 하겠다.

    이러한 엄격한 군율에 병기와 병술을 개량한 대병력의 별무반을 이끌고 1107년에 윤관은 여진족을 정벌하고 9성을 쌓는 공적을 세웠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별무반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15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별무반의 설치와 해체는 병농일치에 입각한 군사조직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단계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수있습니다.

    군사조직에 참여하게 되는 양인 농민들의 사회적 지위와 그들의 사회적 인식에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별무반은 전문 군인 집단으로 구성된 군사 조직이 아니라, 병농 일치(兵農一致)의 이념을 바탕으로 지배층에서부터 일반 양인까지 망라하여 편제한 군사 조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별무반은 군의 전략과 전술적인 측면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습니다.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나간 고려가 패한 원인을 파악하고 대책을 세워 만든 부대가 별무반입니다.

    여진은 말을 탄 기병이 중심인데 반해, 고려는 보병 중심의 부대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고려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려며 말을 타는 기병인 신기군와 보병인 신보군,

    승려로 이루어진 항마군을 편성하고 활과 포를 다루는 특수병으로 구성하여

    여진을 정벌하여 승리를 거두고 그 자리에 동북 9성을 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