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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막힌다람쥐80
기막힌다람쥐8023.07.19

손병의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3.1만세운동의 주역이며 천도교 지도자였다는 것 외 정보를 추가로 더 알수 있을까요?

손병의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3.1만세운동의 주역이며 천도교 지도자였는데 일대기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천도교가 아직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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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손병희 선생은 호 의암, 초명 응구, 후명 규동으로 충국 청주 출생입니다. 1882년 22세때 동학에 입교, 3년 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수제자로서 연성수도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으로서 북접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의 전봉준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해 관군을 격파하였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 강계 등지로 피긴, 18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쓰다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로 망명해 이상헌이라는 가명을 썼습니다. 다시 일본으로 가 오세창, 박영효 등을 만나 국내 사정을 듣고 1903년 귀국,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해 일본으로 데리고 가 유학시켰습니다.

    1904년 권동진, 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를 조직 후 이용구를 파견해 국내 조직에 착수,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게 단발령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재,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단체인 유신회와 합하여 일진회를 만들고 을사늑약에 찬동하는 성명을 내자 즉시 귀국해 일진회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분자 62명을 출교시켰습니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 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를 창립해 보성, 동덕 등의 학교를 인수해 교육, 문화 사업에 힘썼습니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에서 사망했습니다.

    천도교는 현재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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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손병희 선생은 1861년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태어나 동학에 입도하여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습니다. 1898년 동학의 3대 교주가 되어 동학 천도교로 개명하고 교세를 확장했습니다. 일본으로 망명하여 근대화와 개혁을 주창하고 유학생을 양성했습니다. 말씀대로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가석방으로 풀려나 1922년 순국했습니다. 교육 사업가로서 고려대학교와 동덕여자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와 동덕여자의숙을 운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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