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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한사발
숭늉한사발23.03.18

경복궁은 중건하는데 왜 그리 오래 걸렸나요?

조선의 제1궁궐이라고 볼 수 있는 경복궁은 왜란 때 소실 후 300년 가까이 방치되었다가 고종 때에 와서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됐는데 그렇게 오래 걸린 이유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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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9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권을 강화로 그 정점에 경복궁 중건이 있습니다. 이는 왕실을 힘을 과시하기 위한 본보기로서 흥선대원군이 추진한 사업입니다. 하지만 궁궐의 축조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그러한 돈이 당시의 조선 조정(정부)에는 없었습니다. 결국은 나라에 돈이없어 중건을 못하였고 정치적 상황때문이었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18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경복궁의 중건의 공사기간이 길어진 이유는 자금의 부족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기지역 농민들에게는 경복궁 중건 사업에 동원되는 부역이 큰 고통이었다. 특히 부민들이 원납전 만을 내고 부역에 동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농민들은 이중의 고통을 당하였다. 또한 중건사업에 필요한 기술인력이 모자라자 강제적으로 승려중의 장인들에 대한 동원령을 내렸으며, 나아가 자금부족이 심화되자 민간인 工匠도 강제 동원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착공 3년되던 해인 고종 5년(1868)에 경복궁은 완공되었다. 그해 7월 고종은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사하였다. 하지만 대규모 토목사업은 경복궁이 완공된 뒤에도 계속되었다. 대원군은 종묘·종친부·육조 이하 각 관서는 물론이고, 동대문·북한산성 등의 성곽의 개축을 계속하였다. 영건도감은 고종 9년 9월까지 존속하였으니, 대원군 집정기 거의 전 기간 동안 도성 정비를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가 지속되었던 것이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경복궁이 오랫동안 폐허로 있었던 이유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모든 궁궐이 불타자 선조는 임시로 지금의 덕수궁에 머물렀는데 규모가 커서 재료와 인력을 동원하기 어렵다는 이유와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창덕궁과 창경궁을 먼저 짓게 되었고 이후 270년 후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은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은 1865년 4월 26일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의 지시로 경복궁 중건의 계획을 발표하고 영건도감을 두어 공사에 착수하니 찬, 반의 의견이 분분했으나 대원군이 그 총책임을 맡고 일을 그대로 추진합니다.

    처음 백성들의 부역에 신중을 기하고 관리와 일반 백성 및 종친들에게 고루 원납전을 강제로 바치게 하여 자진하여 부역하는 사람이 많았고, 대원군도 이들을 위해 위로금도 지급하고 무동대, 농악대 혹 남사당패를 동원하여 격려, 고무하여 공사가 순조로웠는데 큰 재목이 필요하여 능의 산림에서도 나무를 베어다 쓰고 다음해 음력 3월 재목장에 큰 불이 나서 건축 작업 전체에 큰 지장을 초래합니다.

    1866년 3월 화재가 발생, 전각과 재목이 소실되자 흥선대원군은 노하여 흥인군과 이경하를 투옥, 처형하려고 하나 중신들의 만류로 그만두었고 당시 마감용 목재에 기름칠을 하는 창고에서 불이 나 800여칸에 쌓아 둔 목재가 모두 타버려 공사가 중간될 처지에 놓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복궁을 중건하는데 오래 걸린 이유는 재정 때문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경복궁을 중건 하기 위해서 엄청난 재정이 필요했는데 나라에 돈이 없어서 원납전을 강제 징수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납전을 많이 낸 사람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 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사실상 경복궁 외 다른 왕이 거처할 수 있는 궁궐이 있었기 때문에 중건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것이라 할 수 있고, 기술력 등도 부족했었던 것도 원인입니다. 그러다가 대원군 때 왕실의 권위를 높인다는 명목 하에 당백전을 발행하고 중건한 것이 됩니다.

    - - - 추가적으로 궁금하신 점은 의견으로 남겨주시면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성의껏 답변을 드려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 -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먼저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원납전이란 일종의 기부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말만 기부금이지 거의 강제 징수에 가깝게, 평민이든, 양반이든 관계 없이 너무나 많은

    돈을 강제로 가져가게 됩니다.


    또, 경복궁을 중건하는데 양반들의 묘자리에 쓰는 묘지림을 벌목하여 쓰게 되는데

    이로 인해 양반들에게도 커다란 앙심을 품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국가경제에 미친 영향에 가장 큰 것인데요.


    당백전이란 악화를 발행 했다는 것입니다.

    당백전은 당시 통용되던 화폐의 약 100배의 가치를 갖게 되는 돈인데,

    이것을 마구 찍어내어 사용함으로써, 총 화폐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게 되어 쌀한말이 50전 하다가 발행후 5700전으로 비싸지는 등의 기록으로보아

    화폐가치가 너무나 떨어져 국가에서 돈을 추단 할 수 없는 현상도 일어나게 되어


    안그래도 돈이 없는 백성들은 그 엄청난 물가를 따라가지 못해 굶어 죽는 사람도 태반이었다고

    합니다. 그 만큼 인플레이션 없이 화폐를 관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인데

    흥선대원군은 너무 쉽게 생각해 버린 것이죠.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복궁 건축이 오래 걸린 이유는 다양합니다. 첫째, 건축 작업이 긴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건축 작업의 기간이 길어진 것은 왕조의 궁궐로서의 기능과 규모가 확대되면서 건축 작업이 끊임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둘째, 건축 기술과 재료의 한계로 인해 건축 작업이 어려웠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건축 기술과 재료가 한계적이었기 때문에, 건축 작업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셋째, 사회적 변화와 국가의 상황 변화로 인해 건축 작업이 지연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중기부터 후기에는 외적 침략과 사회적 변화 등으로 인해 궁궐 건축 작업이 지연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경복궁 건축 작업은 긴 시간 동안 지속되었으며, 이는 한국 전통 건축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방치된 농경지가 많아져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어 이에 따른 조세수입이 급감했습니다. 또한 정유재란이 벌어졌으며 17세기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이에 따른 정부재정에 큰 압박이 되어 이를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또한 그 전 이궁으로 쓰던 궁을 정궁으로 쓰면서 막대한 재정과 노동력이 들어가는 경복궁 중건에 쉽사리 착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19세기 세도정치기에는 왕실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세도가문이 위세를 떨치던 시기인데 왕실을 위해 궁을 재건할 리가 없었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