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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라히반딫불754
아스라히반딫불75423.08.25

목화씨로 유명한 문익점의 구체적인 업적이 궁금합니다

고려말에 원나라로 파견되었다 다녀오는 길에 원나라에서 가져가지 못하게한 목화를 우리나라에 가져와 보급을 하게 됨으로 목화재배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업적을 인정받고 있나보다하고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혹시 이보다 더 심오한 구체적인 업적들이 있을까요?그의 목화씨 반입이 당시 조선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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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25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문익점은1360년에 계품사로 원나라에 갔다고 합니다.

    이 당시에 목면 재배와 무명의 보급은 정말 큰 업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계품사란 중국 황제에게 특별히 헤아려서 잘 조처하여 달라고 청원할 일이 있을 때 보내는 사신을 말합니다.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지고 온 문익점은 목화 재배에 힘을 쏟았다고 합니다.

    사행을 마치고 돌아온 문익점은 1364년 고향인 진주로 내려가 장인인 정천익과 씨앗을 나누어 목면나무의 재배를 시험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심은 것은 모두 재배에 실패했지만, 정천익이 심은 씨앗 가운데 하나에서 꽃이 피어 100여개의 씨앗을 얻었다. 해마다 재배량을 늘려서 1367년에는 향리 사람들에게 씨앗을 나누어주며 심어 기르도록 권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천익은 호승인 홍원에게서 실을 뽑고 베를 짜는 기술을 배워 10년이 되지 않아서 나라 전체에 목면 재배와 무명이 보급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문익점은 고려 우왕 때인 1375년(우왕 1)에 전의주부로 등용되었으며, 1389년에는 중서문하성의 간관인 정사품 좌사의대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양왕 때 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에 반대했다가 조준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났고, 1398년(조선 태조 7)에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오면서 면직물 생산이 처음 시작되었다는 기존의 통설은 비판되고 있지만, 문익점과 정천익의 목면 재배와 보급이 면직물 생산을 널리 보급하는 데 기여하여 백성들의 옷감이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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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문익점은 알다시피 중국에 가서 붓뚜껍에 목화씨를 담아 온 위인입니다.

    문익점은 가져온 목화씨를 심었지만 다 죽고 장인 정천익이 심은 목화 중 딱 하나만 살아남았습니다.

    그 목화로 다음번에는 여러 송이의 목화를 심기를 반복하자 목화는 흔한 것이 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갓습니다.

    그런데 목화에서 실을 뽑아 옷감을 짜는 방법을 몰랐던 문익점의 손자 문래가 실 뽑는 기구를 만들었고 그의 이름 문래에서 물레라는 말이 나왔다는 일설이라는 책도 있고 태조실럭에는 정천익이 원나라 승려에게서 배웠다고 쓰여 있습니다.

    하여튼 문익점을 통해서 고려 사람들은 따뜻한 목화가 들어간 옷으로 삼베옷을 여러 벌 걸쳐 입고 지냈던 시절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삼베솜으로 두툼한 솜이 들어간 이불을 덮게 되었고 사람들은 얼어 죽는 일이 줄어들었습니다.

    문익점은 붓뚜껍에 목화씨를 넣어 왔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그것은 알 수 없는 사실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몇몇 사실은 거짓이거나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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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문익점은 1364년 진주로 내려가 장인인 정천익과 씨앗을 나누어 목면나무의 재배를 시험, 정천익이 심은 씨앗 가운데 하나가 꽃이 피어 100여개의 씨앗을 얻고 , 해마다 재배량을 늘려 1367년 향리 사람들에게 씨앗을 나누어주며 심어 기르도록 권장, 정천익은 호승인 홍원에게서 실을 뽑고 베를 짜는 기술을 배워 10년이 되지 않아 나라 전체에 목면재배와 무명이 보급됩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며 문익점은 고려 우왕때인 1375년 전의주부로 등용, 1389년 중서문하성의 간과인 정사품 좌사의대부가 되었습니다.

    목화 재배를 시작해 목화의 개량과 보급에 있어 일대 혁신을 가져와 민간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했습니다.

    겨울에는 원시 시대부터 입어온 갖옷이나 삼국시대부터 생산된 계 등의 모직물로 옷을 갖춰 입었을 수도 있지만 무명은 베나 모시에 비해 더 부드럽고 따뜻해 추위를 막는데 효과적이었고 목화 솜으로 솜옷을 만들어 입을수 있었습니다.

    개량종의 도입이 당시 한반도인의 의생활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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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얻어가지고 왔다고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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