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인 최초의 미국 영화배우 필립 안.
세상에 그가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아들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에 대해 너무 관심이 없고, 그들의 발자취에 무심했던것 같습니다. 필립 안의 삶과 그의 작품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필립 안은 1930~1970년대에 활동한 한국계 미국인 배우로,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의 장남으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해 살았으며 당시 인기있고 유명한 아시아 배우였습니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하일랜드 파크에서 태어난 최초의 재미교포 2세로 여겨집니다.
미국의 공업고등학교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흥사단에 잠시 소속되었다가 북캘리포니아에서 농업관련 사업을 운영했지만 자연재해 등으로 잘 되지 않았고, 호텔 엘리베이터 보이 등 여러 일을 하다 파트타임으로 배우일을 시작했습니다.
1934년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입학해 국제통상학을 전공하고 웅변을 부전공으로 졸업하였고 영화학 수업을 수강하기도 했습니다.
배우를 본업으로 삼기로 결정했을 때 모친 이혜련 여사가 그의 결정을 반대했지만 독립운동을 위해 미국을 떠나있던 아버지 안창호가 귀국해 영화도 예술이다. 기왕 할 것이라면 네가 할수 있는 한 최고가 되어라, 며 그의 결정을 지지해줘 배우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할리우드에서 동아시아계 배우들이 설 자리는 많지 않아 처음 스크린 테스트를 봤을 때 떨어진 이유가 동양인치고 영어를 너무 잘해서 였습니다.
두번째 작품이 될 Anything Goes의 인터뷰장에서도 같은 일을 겪는데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에게 퇴짜를 맞고 나간 안필립이 잠시 후 돌아와 영어로 당신 나 안좋아함, 괜찮아?, 나 안상관? 등의 어설흔 영어를 흉내냈고 이에 박장대소한 마일스톤이 그를 캐스팅 합니다.
원래 엑스트라로 지원할 생각이었던 안필립은 조연을 맡게 되는데 이때의 인연을 계기로 마일스톤이 신상옥의 신필름과 한미합작 영화를 만들려고 했을 때 안필립이 도움을 주게 됩니다.
원래는 감독직 제안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Tay Garnett를 추천합니다.
이후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할리우드에서 활동했고 당대의 스타인 엘비스 프레슬리, 프랭크 시나트라, 빙 크로스비 등의 주연 작품에 출연했고 이들 중 상당수와 직접 호흡을 맞췄습니다.
일본인 , 중국인, 한국인 등 주로 아시아인 역할을 했지만 할리우드 시스템이 한창이던 시절 그나마 활발하게 활동한 배우였고 당시 미국에서 성공한 거의 유일한 한국계 배우였습니다.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하야카와 셋슈나 1957년 사요나라 라는 영화로 아시아계 배우로 처음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우메키 미요시, 애너 메이웡, 키이 루크 , 낸시 콴 등 다른 동아시아계 배우들은 여럿 있었지만, 한국계 배우는 필립안을 제외하고 그나마 활동했다고 볼법한 한국계 배우는 오순택 정도였고 그는 1978년 2월 28일 새벽 5시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남 필립안에 대한 이야기를 정종화 영화 평론가가 잘 기록해 놓았습니다.
아래의 내용으로 대신합니다.
정종화의 한국영화 진기록 100년] 도산 안창호의 아들 필립 안의 영화인생
우리 영화 100년사에서 미국에서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이신 도산 안창호의 장남 필립 안의 영화 인생은 정말 파란만장한 한 편의 서사시이기도 하다.
1905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1978년 73세로 타계하기까지 영화와 TV 드라마까지 300여 편에 출연한 연기자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새긴 최초의 한국인이다.
그는 독립운동가의 아들이었지만, 악독한 일본군이나 중국인으로만 영화에 나와 재미 동포들로 부터 질타를 받으며 주어진 연기에 고군분투했다.
우리나라에서 상영한 샤리 템풀과 공연한 '소공녀'와 제니퍼 죤스와 윌리암 홀덴의 '모정'에선 중국인으로 연기했다. 반면 케리 쿠퍼가 주연한 '새벽의 토벌대'와 '장군 새벽에 죽다'에선 일본군으로 나왔다. 당시 할리우드의 영화에서는 동양이란 무대 속엔 코리아란 존재가 없어 한국인의 역할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 6·25 전쟁이 나자 1957년 딘 헤스 대령은 목사의 신분에서 공군 조종사로 자원 지원해 수원비행장으로 온다. 여기서 배고픈 고아를 돌보며 2차 대전시 전투기의 포탄 고장으로 고아원을 폭격한 죄책감을 자괴한다. 딘 헤스 대령의 실화를 영화화한 '전송가'에서 필립 안은 그토록 염원했던 한국인 역을 맡아 조국의 긍지를 스크린에 보였다. 고아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 가는 노인 역인데 52세였다.
그는 고교 졸업 후 농사 일과 엘리베이터 보이로 일했으며 우연히 할리우드 스튜디오에 갔다가 스크린 테스트를 받게 되면서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러나 모친의 완강한 반대로 배우의 길은 순탄치 않아 고민 하던 중 부친 안창호의 허락을 받고 연기자가 됐다. 그는 1972년 TV시리즈 '쿵푸'로 명성을 날리며 이름을 떨쳤다.
필립 안은 1945년 늙깍이로 미 육군 연예병사로 복무했으며 1962년 고국을 방문해 김묵 감독의 '싸우는 사자들' 촬영 현장을 찾아 엄앵란, 최지희, 김석훈, 황해와 기념사진을 남겼다. 특히 1971년 부친의 이름을 딴 '도산공원' 기공식에 초청되어 가문의 영광이 되었다.
미국의 쟁쟁한 스타가 나오는 '전쟁과 애욕'(never so few)에서는 버마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버마의 지도자로 나와 프랑크 시나트라와 스티브 맥퀸, 찰스 브론슨, 피터 로버트 등 쟁쟁한 배우와 공연해 스타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인종차별과 동양인의 장벽을 허물고 할리우드 배우로 긍지를 지니며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스크린을 빛낸 필립 안을 다시 한번 추상해 본다.
출처 :
https://www.interview365.com/news/articleView.html?idxno=89670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큰 아들인 필립 안이 처음으로 데뷔한 영화는 루이스 마일스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필립은 뛰어난 연기를 인정 받아 아시아인 전문 배우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데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The World's Greatest Athlete, Thoroughly Modern Millie, Jonathan Livingston Seagull 등 200여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그의 커리어 하이는 1972년부터 1975년까지 방영되었던 TV시리즈 쿵푸 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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