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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박새218
심심한박새21822.09.16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까지 일어난 이유가 뭔가요?

최종병기 활 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배경이 병자호란이라고 하더라고요.

청이 침입한 난이라고 하는데 그전이 정묘호란이라고 한번 더 있었다고 하네요.

정묘호란에 이어서 병자호란까지 일어난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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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묘호란은 여진족이 후금을 세우고 난 이후에 일어납니다. 광해군 대에는 명과 후금 사이 중립외교로 화를 면할 수 있었는데 반정으로 즉위한 인조 대에는 친명배금 정책을 펼치게 되는데 이러한 정책으로 결국 졍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명의 모문룡 군대가 철산 가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후금은 이에 불안을 느끼고 조선이 명군을 지원하는 것에 불만을 갖고 있던 터에 이괄이 공신책봉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다 실패하자 후금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이괄은 광해군 폐위가 부당하며 조선방비가 허술하니 속히 조선을 치라했고 실제 후금의 군대가 쳐들어 왔는데 조선이 대비가 부족해 패배하고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고 무역을 하고 명과 관계를 끊는 것을 조건으로 후금이 물러납니다.

    그 이후 친명정책은 계속되고 후금의 세폐요구와 변경 약탈이 심화해 조정에서는 후금을 치자는 척화론이 커지던 차에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본격적인 중국 정복에 앞서 명을 지지하는 조선을 먼저 치고자 하여 병자호란이 일어났습니다. 청태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왔고 인조는 강화도로 건너가 항전하려다 남한산성에 갇히고.결국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며 청과 군신관계를 맺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조선과 사대관계인 명나라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고 후금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광해군은 중립 외교를 펼치며 국익을 도모하려 했으나, 명과의 신의를 버리고 오랑캐인 후금과 화친할 수 없다는 사대부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결국 반대파에서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세운 왕이 인조입니다.

    인조는 친명배금 정책을 취했습니다. 세력이 커진 후금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이죠. 그래서 1627년 조선에 형제관계를 요구하며 일으킨 전쟁이 정묘호란입니다.

    결국 조선은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었으나 이후 후금은 청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1636년 침공하니 이게 병자호란입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테스티아입니다.

    * 정묘호란(1627)의 경우 당시 후금이 명과 전쟁 중이어서 조선까지 침략할 겨를이 많지 않았으므로 형제의 나라가 될 것을 약속하고 물러났던 것인데, 1636년 병자호란의 경우 청이 사실상 승기를 잡고, 조선에 군신관계(왕과 신하관계)를 요구하며 쳐들어온 것입니다. 결국 이 전쟁에서 대비하지 못한 조선은 속절 없이 무너졌고, 삼전도의 굴욕을 통해 인조가 청 태종(홍타이지)에게 항복하면서 완패합니다.